Page 68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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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해주최씨의 총본부로도 사용되었으나 오산세교신도시 개발로 문헌서원이
수용됨으로 인해 현재는 영정각만 남게 되는 아픔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영
정각이라도 남아서 그중 다행이라 하겠다. 매년 4월 넷째 일요일에 향사한다.
최충과 그의 두 아들 영정을 모시고, 매년 4월 넷째 주 일요일에 대제를 지낸다
영정각의 주인공 최충에 대해 알아보자. 해주최씨 시조 고려 최온의 아들로 고려
목종8년(1005) 문과에 급제하고, 현종2년(1011) 우습유를 거쳐 1013년 국사수찬관
이 되어 『칠대실록』에 참여하였다. 덕종2년(1033)에는 ‘형부상서 평장사 수사도
수국사 상주국’을 거쳐 문종1년(1047)에는 문하시중에 올라, 율령을 교육함으로서
고려 형법의 기틀을 다지는데 힘썼다. 문종7년(1053)에는 궤장을 하사받고, ‘개의부
동참사 수태사겸 문하시중 상주국’이라는 최상의 관계훈작을 더하고, 문종9년
(1055) 내사령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다. 최충은 간혹 이름난 선비들이 찾아오
면 여러 제자와 더불어 초에 금을 그어놓고 그 금까지 타기 전에 시를 지어 읊는
각촉부시(刻燭賦詩)라는 시 짓기 대회를 열어 성적대로 차례로 앉히고 술잔을 돌리
는 행사도 열었다. 여러 차례 지공거를 거친 최충의 문하에는 과거시험에서 합격하
고자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임에도 그의
시문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무신란 이후 특히 정중부에 의해 문신이 많이 살해되
고 그들의 문집도 함께 없어졌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최충은 평소 두 아들 최유선
과 최유길에게 권력보다는 학문의 길에 종사하라는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했다 한
다. “선비가 세력에 빌붙어 벼슬을 하면 끝을 맺기가 어렵지만, 글로써 출세하면 반
드시 경사가 있다. 나는 다행히 글로써 현달하였거니와 깨끗한 지조로써 세상을 끝
마치려 한다.”고 했다 한다. 선생의 유언대로 최사추 등 자손 수십 명도 이후 모두
학자로서 재상에 올랐으니, 선생은 자손들의 교육에도 성공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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