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9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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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사립교육기관인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열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사립고등교육
의 개척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구재학당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자 다른 유학자
들이 이를 본떠 당시 11개의 사숙이 개설되어 그의 사숙과 함께 12공도로 불렸다.
당시의 명유로서 해동공자로 추앙되었던 선생과 그의 제자들을 가리켜 문헌공도라
했다고 『고려사절요』에 전한다.
선생은 유학의 시조라 일컫는 공자의 유학의 내용을 발굴하는 훈고학적인 유학을
연구하였는데, 이것은 그 당시 진시황제의 분서갱유(BC213~BC212)사건과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의 격전(BC209~BC202)으로 인해 학문의 단절을 가져온데 기
인하여 한나라 이전의 서적을 읽는데 어려움이 생기자 유행한 훈고학이 활성화 된
다. 선생이 이 훈고학적 유학에다 자신의 철학을 접목했다는 것이다. 일종의 최충학
이다. 이러한 연유로 유학과 덕으로 해동공자란 칭호도 얻게 된 것이다. 선생이 해
동공자라는 칭호를 듣는 이유는 9재에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많은 제자를 양성했는데 육예에 능통한 자가 70여명에 이르렀다 한다. 최충도 9재
에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기에 공자와 견주어 해동공자라는 칭호를 듣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오히려 최충 사후 유학자로의 위치에는 불리하게 작용되어 조
선시대 유학자들은 선생을 단지 과거시험 교육에 전념한 학자로 이해했으며, 또 불
교 문자를 썼다는 이유로 그를 문묘에 배향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동방의 비
조라 일컬으며 정몽주를 높이 평가하는 것에 비하면 초라한 평가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동방학교의 흥함은 대체로 최충부터이다.” 라는 기록은 선생을 단지 교육
에 공이 있는 인물로만 평가했던 것이다. 선생이 그나마 서원에 배향될 수 있었던
것은 최초로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에 의해서였다. 주세붕은 황해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고적 탐사를 하던 중 해주 수양산 덤불 속에서 선생의 사당을 발견하게
됐는데, 사당의 누추한 모습에 한탄하며 그곳에 수양서원(首陽書院, 文憲書院)을 세
우고 선생을 배향한 것이 이 땅에 문헌서원이 있게 된 배경이다. 저서에 『문헌공
유고』가 있다.
현재 오산시에는 문헌공 최충의 이름을 딴 도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도로명은 문
헌공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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