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3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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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사단 등이었는데, 그 중 선견부대(제24사단 제2연대 1대대)를 부산으로 공수하
고, 나머지 주력부대는 해상 기동으로 파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 7월 1일
부산으로 공수된 24사단의 스미스부대는 1950년 7월 2일 대전으로 북상하여 안성
평택 선에 진지를 구축하여 후속 주력부대의 내한을 기다리며 지연전을 벌이기 시
작하였다.
1950년 7월 2일, 대전역에 도착하는 스미스기동부대
그런데 수원이 북한 인민군에 점령당한 그 다음날인 1950년 7월 5일 아침, 미군
의 스미스부대는 오산 북쪽의 죽미령에서 남진하는 북한 인민군을 맞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미 지상군의 첫 전투로 기록되고 있는 오산 죽미령전투이다.
스미스부대는 원래 대대장 찰스 B. 스미스 중령의 이름을 따 스미스기동부대라고
하였는데 줄여서 스미스부대라고 부르고 있다. 스미스부대는 완전 편성 부대 조직
의 정수에 모자란 2개 소총중대, 본부중대 일부, 그리고 통신소대로 이루어졌다. 죽
미령 방어선에는 스미스부대 외에 밀러 O. 페리 중령이 지휘하는 미 제52야전 포
병대대 일부 병력도 투입되었다. 이 보병대와 포병대를 스미스 중령이 이끌고 전투
에 임했다. 스미스 중령이 이끈 죽미령전투 인원은 다음과 같다. 스미스부대의 보병
장교 17명과 보병사병 389명, 합 406명. 페리 미 제52포병대의 포병장교 9명과 포
병사병 125명, 합134명. 도합 미군 참전 수는 총 540명이었다.
자세히 시간별로 알아본다.
미 지상군은 오산 부근에 투입되어 1950년 7월 4일에서 5일까지 전투를 하게 된
다.
북한 인민군은 서울 한강 이북을 점령한 3사단과 4사단 병력이 1950년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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