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5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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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츰 시계가 좋아지며 수원까지 보이던 시각은 스미스부대가 북한 인민군과 첫
조우한 1950년 7월 5일 오전 7시경이었다. 8대의 전차를 앞세운 북한 인민군의 제
4사단 16·18연대 4000여명이 수원 쪽에서 스미스부대가 포진하고 있는 죽미령을
향해 진격해옴으로써 전투가 벌어졌다.
1950년 7월 5일 오전 8시 16분 오산 죽미령에서 초탄을 발사하는 미 제 52 야포대대
북한 인민군이 죽미령을 올라오는 순간 아군의 포병이 발사한 포탄이 작렬하였다.
그러나 적의 전차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전차는 미동도 하지 않고 계속 전진해 왔
다. 북한 인민군의 전차대는 아군의 다양한 공격에도 유유히 보병진지를 통과해 죽
미령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때 40여 분간의 전투에서 20여명의 피해를 보면서도 적
의 전차를 파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미군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보병진지를 통과한 북한 인민군의 전차들이 죽미령 고갯마루에 올라섰을 때 미군
은 오전 8시 15분경 보유무기 중 가장 화력이 강한 105mm 곡사포의 대전차 포탄
으로 북한 인민군의 대전차(탱크T-34) 2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보유하고 있던 대전
차포탄 6발을 전부 소모하자 나머지 전차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105mm 포대의 포병 사격으로 북한 인민군을 공격하였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
한 것이었다. 무기의 부족으로 중과부적이 된 것이다.
죽미령전투는 차츰 근접전으로 화하기 시작하였는데, 22발의 바주카포탄을 얻어맞
은 북한 인민군 전차는 끄떡도 하지 않고 기동해왔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경기관
총으로 응사하며 용전분투하다가 북한 인민군 전차병의 다발총탄에 맞아 전사한 켄
넌트 샤드릭 일등병은 미군 보병의 첫 전사자로 기록되고 있다. 75mm 무반동총
그리고 2.36인치 바주카포도 북한 인민군의 전차 대열을 완전히 저지시키기에는 역
부족이었던 것이다. 이 전투로 페리 중령이 부상했으나 후송을 거절하고 전투를 진
두지휘했다. 10분 후에 1개 반의 북한군 전차대가 고개를 내려오자 병사들은 공포
에 사로잡혀 진지를 이탈하여 도망쳤다. 그러나 장교들은 동요하지 않고, 자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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