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0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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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미령  유엔군초전비와  오산전투



                                          -  죽미령전투와  갈곶리전투





                  1.  남북분단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불법  점령하며  겪게  된  36년간의  일본  식민지  압제통치를
                  경험한  것은  민족적  수치였다.  이에  우리  한민족은  끊임없이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이루어낸다.

                    그러나  한민족의  일본으로부터의  광복은  주체적인  우리  힘으로만  이루어낸  것이
                  아니어서  한반도는  힘의  공백  상태를  초래하게  된다.  그로인해  한반도  남쪽에는  미
                  군이,  북쪽에는  소련이  진주하게  된다.  결국  일본의  불법적인  침략과  무단  점령은
                  광복이  되었어도  하나의  국가로  원상회복이  되지  못한  채  남북  분단이란  고착적인

                  민족  갈등으로  변질되게  된  큰  원인이  된  것이다.
                    한반도  북부에  진주한  공산국가  소련의  영향하의  북한은  공산주의자  김일성이  장
                  악하였고,  소련의  지원  하에  김일성은  공산주의로  남북한을  통일한다는  명분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1950년  6월  25일  무력  기습  전면전을  일으킨다.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는  변변한  대비책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6·25  한국전쟁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  것이다.

                      김일성이  도발한  6·25  한국전쟁  중에서도  오산에서  북한  인민군과  싸운  유엔군과
                  한국군의  오산전투(죽미령·갈곶리)와  유엔군의  오산  죽미령전투  기념비인  유엔군초
                  전비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2.  유엔군초전비  건립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기습  남침하여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기세를
                  몰아  남하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유엔군이  구성된다.  그  유엔군의  일원으로

                  1950년  7월  5일  미군  제24사단  소속  보병부대  및  제52야포대대  소속  1개  중대로
                  편성된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스미스전투부대  540명이  북한  인민군의  남하에  맞서
                  죽미령에서  싸운다.
                    이곳  오산  죽미령은  최초의  유엔군과  북한군이  충돌한  곳인데,  유엔군으로서  미군
                  이  참전했기에,  미군이  북한군과  최초로  조우한  곳이기도  하다.
                    이  오산  전투에서  한국군  제17연대  9중대가  갈곶리에서  죽미령의  스미스부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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