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0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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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죽미령  전투  후  오산  상황과  전투의  의의





                    이로서  오산지역은  적  북한  인민군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인민군은  2개월  18
                  일간  오산지역을  지배하다가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보급로가  끊기고  미군의  공

                  격을  받게  되자  퇴각하기  시작한다.  1950  년  9월  24일부터  28일까지  미31연대  제
                  2대대는  인민군  전차대와  수원-오산간  국도  및  철로  변  지대에서  전투하였고,
                  1950년  9월  28일까지  인민군의  모든  진지를  탈환하였다.

                    서울  수복  후  3개월  10일  만에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7일  오산

                  을  다시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유엔군은  1951년  1월  15일  오산지역의  중공군을
                  물리치고  1951년  1월  16일  오산을  재탈환하게  된다.

                    6·25전쟁(한국전쟁)은  전  국토가  전쟁터이었으나  최초의  전투가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시작된  곳이  오산이므로  오산  죽미령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하겠다.  3

                  년  1개월간의  전쟁으로  한국  역사상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은  전쟁이었다.  남북한
                  에서  150만의  사망자와  360만의  부상자가  생겼으며  온  국토가  파괴되어  초토화되
                  었다.  이  전쟁으로  민족  내부에  갈등이  심화되고  남북한  대립이  고착되었다.  이러한
                  이유로도  김일성은  민족의  씻을  수  없는  반민족적  행위자인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안전보장조약이  체결될  수  있었던  것
                  은  미군이  한국전쟁  최초의  전투를  담당하였고,  인명피해를  입은  죽미령  전투의  역
                  사적  의미를  함께  나눈다는  혈맹의  동맹군으로  공동방위의  필요성을  공감한  때문이
                  다.  북한군도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제4사단  문화담당  부사단장을  포함하여  전사자
                  42명,  부상  85명의  인명피해를  냈으며  전차  4대를  잃었다.


                    한국전쟁이  국제적인  성격을  지닌  것은  오산지역에서의  전투양상에서  분명히  나타
                  난다.  국군,  북한  인민군,  유엔군(미군),  중공군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싸웠고  소련
                  은  북한  인민군을  지원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오산지역은  1950년  7월  5일부터  9월  22일까지  2개월  18일
                  동안  공산당에  의한  인민위원회를  경험했다.  마을인민위원회는  인민위원장,  여맹위
                  원장,  서기장,  자위대장  등이  선출되었는데  새로  선출된  인물은  다른  지역에서  온
                  좌익계  사람들이었다.  당시  오산리에  인민위원회  사무실이  있었고  주민의  권유로
                  총대를  멘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혈연집단과  씨족  구성이  강한  이곳에서는  마을
                  청년들을  도피시켜  의용군  모집에  응한  숫자는  적었다.  토착  좌익활동가들이  농민

                  위원회나  민청위원장을  맡기는  하였으나,  의용군  지원을  권유하였을  뿐  강제적으로
                  징집하지는  못하였다.  인민위원회의  주도하에  토지개혁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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