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7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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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고 한국을 떠났다. 1967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해서 아리조나주 피닉스시에서 살
다가 2004년 5월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이러한 남아있는 전투 기록으로 보면 북한 인민군의 남진을 쉽게 저지할 수 있으
리라는 미군의 낙관적인 기대가 얼마나 큰 오판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스미스부대원들도 미군이 전선에 나타난 것을 알면 북한 인민군이 겁
을 먹고 달아날 것이라는 맥아더 원수의 말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이었다고 봐진다.
북한 인민군과의 첫 지상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은 미군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
며, 동시에 북한 인민군의 전투 능력에 대해 처음으로 정확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스미스부대와의 최초 교전은 북한으로 하여금 미군의 한국전 참전 사
실을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남침 공산화 통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전
투라고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오산 갈곶리 전투 상황
한국군의 오산전투 참여 상황을 보도록 하자.
황해도 웅진반도에서 철수한 한국군 제17연대가 스미스부대를 지원할 임무를 띠고
오산으로 이동한다. 17연대는 LST와 민간어선을 이용하여 웅진반도에서 1950년 6
월 26일에서 27일까지 이틀간에 걸쳐 인천으로 철수한다. 그러나 17연대의 피해는
적지 않아 113명이 전사했고 371명이 부상했으며 64명이 실종됐다. 그리고 인천에
상륙한 부대는 많은 혼란을 겪게 되는데, 일부 병력은 트럭으로 영등포와 수원을
경유해 대전에 집결했고 잔여부대는 걸어서 혹은 열차편으로 대전에 있는 본대와
합류하였다.
대전에 집결한 제17연대의 병력은 1200여명이었으며, 현지에서 2500명의 신병을
보충 받아 재편성하였다. 편성을 마친 제17연대는 연대장 백인엽 대령의 지휘 하에
하루의 전투훈련과 휴식을 가진 후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제17연대
는 1950년 7월 2일 기차로 대전을 출발하여 평택에 도착한 다음 도보로 오산까지
전진하였다.
그러나, 17연대는 7월 3일 오전 평택에서 아군에 수송될 보급품의 하역 작업을 한
창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오후 3시쯤 호주 공군기의 편대가 나타나더니,
이 화차를 폭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적의 열차로 오판하여 오폭한 것이다. 이 오
폭으로 평택역은 사용할 수 없게 되고 평택 시내의 건물과 인명에도 많은 피해를
주었다. 제17연대장 백인엽 대령도 부상을 당해 후송 조치되었다. 조종사가 한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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