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6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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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가 되어 적의 전차 1대를 파괴하였다. 이것을 본 사병들도 자기 위치로 돌아오
게 되어 겨우 혼란을 수습할 수 있게 되었다.
오산 죽미령전투는 더욱 격렬해져 1950년 7월 5일 오전 9시경에 인민군의 33대의
전차가 나타나자 겁에 질린 일부 병사들이 진지에서 이탈하는 가운데에서 피아군
간에 더욱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국도를 따라 일렬종대로 접근해 오고 있던 북한 인민군 전차대와 후속하는
차량부대 및 보병부대는 미군 포병부대의 맹렬한 사격으로 인해 차량이 불타고 있
을 뿐만 아니라 포탄에 박살이 난 북한 인민군들의 시체가 허공에 난무하는 등 처
참한 참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포격을 피하기 위해 국도 양변으로 산개한 북한 인민군은 죽미령 동쪽의 뱀골
(92m) 능선으로 침입하여 미군들의 방어선을 측면에서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제1선에서 권총을 빼들고 지휘하던 스미스 중령은 곁에서 불을 뿜던 기관총 사수가
적탄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그 자신이 그 기관총을 들고 계속
총신을 휘두르며 사격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오후 2시쯤 북한 인민군은 10배가량 되는 우세한 병력으로 삼면에서 공격해 왔다.
이에 스미스부대원들은 사투를 계속하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불리해져 한
시간 후면 전 대원이 전멸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미군들의 퇴각이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다. 실탄이 동났음은 물론 적 북한 인민군
의 포사격으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죽미령을 우회한 북한 인민
군들에 의해 포위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의식하게 된
스미스 중령은 어쩔 수 없이 예하 부대에 철수 명령을 내렸으며, 안성과 평택 간을
거쳐 천안으로 집결토록 하였다.
그 시각이 1950년 7월 5일 오후 2시 40분이었다. 철수 순서는 C중대, 의무반, 대
대본부, B중대 순이었다. 철수로는 철로 동쪽의 오산으로 이어지는 남북으로 뻗은
능선이었다. 적이 고개를 넘어 오산으로 진출하고 있어 도로를 사용할 수 없기 때
문에 철로를 건너 철수하게 되었다. 화력 지원이 없는 주간에 철수하게 되어 적의
공격을 받으며 철수해야 했기에 피해가 컸다. 미군은 최초의 전투에서 540명의 보
병과 포병 중에서 150명이 전사하고, 장교 5명, 사병 26명이 실종되는 피해를 보았
다.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던지 한 종군기자는 ‘스미스부대 전멸’이라는 기사를 써 보냈
다한다. 이 기사가 전 세계에 퍼지자 북한 인민군 공격이 내전 수준이 아닌 제2차
대전의 승전국 미군을 압도할 만한 잘 계획된 공산주의 팽창을 위한 전쟁인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1950년 한국전에서 최초의 지상전을 벌였고 낙동강전선까지 후퇴해야했던 스미스
중령(1916~2004, Charles B. Smith)은 북진(北進) 대열에 참가, 11월 1일 신의주
남쪽 30㎞ 지점까지 올라갔으나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하다 11월 10일 전출 명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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