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8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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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것이니 제발 알려주시오”라고 사정하니 한참을 망설이던 스님이 “그러면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능 앞에 엎드려만 있어야 하네.”라고 이르고는 유유히 걸
어갔다. 다음날 능지기는 새벽에 일어나 하루 종일 능 앞에 엎드려 있었다. 효심이
지극한 정조대왕은 생부의 묘인 화산을 자주 찾았는데 그날도 화산에 나섰다가 비
를 만나게 되어 수원 행궁에서 유하게 되었으나 비가 오니 아버지의 묘가 걱정이
되었다. 임금은 신하를 불러 “당장 능에 가 보아라. 만약 능지기가 집에 있으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와야 하느니라.” 추상같은 임금의 명을 받은 신하는 능지기의
집에 들러 보니 능지기가 보이지 않는지라 능으로 가 보게 되었다. 능지기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능 앞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신하는 돌아와 임금에게
그 정황을 상세히 아뢰니 정조 임금은 크게 기뻐하며 후한 상을 내렸다고 전한다.
책임감 있는 직업의식과 부모에 대한 효를 돌이켜 보게 하고, 추구했음을 알 수
있겠다. 정조의 어록인『일득록(日得錄)』등 그에 관한 저술을 읽어보면 그가 백성
과 국가를 위해 불철주야 노심초사한 군주임을 알 수 있다. 암살의 위험 속에서도
하루도 책을 읽지 않은 적이 없는 호학군주, 애민군주, 실용군주, 문화군주, 개혁군
주, 계몽군주로 영명한 군주였음을 알 수 있다.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라 한다.
근래 정조가 자신을 독살했다고 오해할 만큼 적대적 관계로 알려진 심환지에게 보
낸 어찰 297통이 발견되어, 지금까지 인식된 근엄한 개혁적 군주의 이미지에 혼란
을 초래하는 새로운 독살을 포함한 새로운 이미지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군주이기
도 하다. 그는 군사(君師 : 임금이면서 스승)를 자처한 즉, 학문적으로도 신하 위에
군림한 정조는 오산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군주이다. 화성궐리사, 필봉산,
삼미 등의 명칭이 그에 의해 유래 되었으며, 독산성이 그에 의해 큰 의미를 갖는다.
그의 능호는 건릉(健陵)이며, 고종 광무 3년에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었다. 그가
효성이 지극하다는 것은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정조대왕이 오산과
도 관계되어 있음은 큰 혜택이다.
3. 오산의 성씨와 관련된 이야기
오산에 삶의 터전을 개척하고 살아간 집안의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먼저 궐
동에 곡부 공씨 ‘공서린 선생의 이야기’, 외삼미동 해평 윤씨 집안에 전하는 ‘윤씨
들이 외삼미에 터를 잡게 된 이야기’, 내삼미동 ‘용인 이씨 집안의 전설’, 가수동
‘청해 이씨 사당에 얽힌 전설’, 벌음동의 이천 서씨 낭자의 이야기인 ‘서랑(徐娘)의
전설’ 등이 전하고 있다. 이 중에서 ‘용인 이씨 집안의 전설’과 ‘서랑(徐娘)의 전설’
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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