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4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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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세워진 오산교회는 오산 최초의 감리회 교회이다. 교회 안에 오산 최초의
남녀 교육기관인 초등학교를 열었다.
애국계몽운동, 교육운동과 함께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오산지역에 의병활동은
드높은 것이었는데, 1907년 오산역 습격, 1908년 3월 원동 일본인 마을을 습격하
며 일본인 살해, 1909년 문시면의 의병장 안춘경이 체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제는 한일합방 이후 오산정미소, 오산우편소, 오산농협실수학교, 오산금융조합
등 근대성을 띤 많은 기관을 오산에 세웠다. 그것이 다소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면
이 있었으나, 그것은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일본인을 위한 것이었다. 결국 한
국인의 성장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1919년이 되면 오산 지역에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다. 3월 14일에 시작되고 3
월 30일에 끝났는데, 오산장날(당시는 음력 3, 8일에 장이 열렸음)인 3월 29일에
대대적으로 오산장 중 우시장에서 이루어졌다.
1917년 당시 성호면 오산장은 연간 거래액수가 17만 4,000원이었고, 수원성내장,
수원성외장은 평균 16만 5,000원이었다. 오산장은 남양장, 발안장, 반월장, 사강장
및 수원성 내외장을 모두 포함하여 가장 거래규모가 큰 장이었으나, 일제강점기
3·1독립만세운동 이후에는 점차 쇄락의 길을 걸었다. 현재 오산장은 100년 전통으
로 홍보하는 오산오색시장과 문헌상 최소 260년이 넘는 전통의 오산(오매)장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오산오색시장은 고객이 밀려다닐 정도로 마켓 기능을 넘어
관광형 형태의 시장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경기 남부의 가장 큰 시장이 되었다. 오
산장터는 현재 재정비에 들어가 새롭게 전통과 젊음과 예술이 공존하는 시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국에게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며,
동시에 우리 민족도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이 광복은 우리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어서, 남쪽에는 자본주의인 미국이, 북쪽에는 공산주의인 러시아연방
인 소련이 진주하여 남북이 분단되는 계기가 된다. 패망한 일본이 아니고, 한국이
분단되는 아이러니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우리 민족은 고착화된 상황을 맞이하
게 되며, 지금까지도 남북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지역에서 유엔이 인정하는 합법적인 정부가 수립되며 대한민국이 탄생한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은 공산주의로 남북한을 통일한다는 명분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무력 기습 전면전을 일으킨다.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는 변변한 대비책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6·25한국전쟁으로 빨려 들어간다. 유엔은 한국을 돕기 위해 유엔군을
구성한다. 1950년 7월 5일 유엔군의 일원으로 미군 스미스전투부대 540명이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 인민군과 최초로 교전한다. 이 전투로 인해 150명이 사망하고, 31
명이 실종되는 피해를 보게 된다. 이날 갈곶동에서는 한국군이 인민군과 교전하는
데, 두 교전에서 병력과 화력이 부족한 미군과 한국군은 퇴각하고 만다. 비록 전투
에서는 적을 제압하지 못했으나, 일방적으로 전세가 밀리던 상황을 지연시키는 역
할을 해 이후 낙동강 전투를 유리하게 전개하는데 큰 성과를 낸 전투가 되었다.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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