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1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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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정조시대 국왕의 正宮이 있는 한성부에 버금가는 도시로서 농업과 상업 개혁의 기반도시로
성장하였다. 더불어 화성유수부에 설치된 장용영외영은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는 조선
시대 최강의 군영이었다.
이와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는 도시에 정조는 도성과 같은 의료기관을 설치하고자 노력하였
다. 일반적으로 지방 행정구역에 조정의 계획으로 설치된 약국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
조는 화성유수부의 도시 위상을 제고하여 약국을 설치하고 의과에 합격한 醫學(의관)을 파견
하였다. 이 의관은 화성행궁 및 화성이 실제적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貳衙에 약국을 설치하여
근무하며 수원지역의 백성들을 구제하였을 것이다.
가전 의학으로 공부한 의관이 아닌 국가가 만든 10學에 의해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의과에
합격한 의관의 화성유수부 임명은 수원지역 의료정책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으리라 판단된다.
정조는 이와 더불어 화성유수부 내에 설치된 장용외영의 군사들의 의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
여 약원과 침의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단순히 장용영 군사들만을 위한 의료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화성유수부내에 있는 빈민들의 구제도 함께 하였다. 돈이 없어 약을 지을 수 없는 군인
들과 빈민들을 위하여 장용외영의 의원으로 하여금 치료케 한 것은 軍民의 일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정조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러한 군민일치의 의도는 1795년 장안문 밖에 만석거
저수지를 만들고 대유둔을 조성함으로써 장용외영 군사들과 일반 백성들이 함께 농사짓고 이
곳에서 생산되는 소득으로 군사들의 급료를 주어 기존의 軍政이 지니고 있는 폐단을 극복하고
자 한 것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정조는 화성 축성 과정에서 축성 과정에서 다친 기술자와 인부들을 위하여 임시 약국
을 설치하여 보살피게 하였다. 단순히 치료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건비를 함께 지불
함으로써 근현대 노사 관계의 모델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정조는 화성 건설에 참여한
기술자와 인부를 위하여 척서단과 제중단 등 다양한 약재를 하사함으로써 민본주의를 지향하
는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정조의 화성유수부에 대한 의료기관 설치와 의료행위는 3년여 걸친 대규모 토
목공사를 함에 있어서 단 1명의 사망자도 나타나지 않은 그야말로 세계사에 없는 역사를 이루
어내었다. 이러한 것은 위민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정조와 관료 그리고 축성 참여자 및 일반
백성들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수원시는 정조의 위민정신과 개혁정신을 이어 화성을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로 조성
하는 대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정조가 지금
까지 보여준 백성 사랑하는 마음일 것이다.
정조대 화성유수부의 의료기관 고찰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