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6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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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아동이 있거든 바로 기별하여 주면 전부 자기가  담당을 하겠다.”고 굳센 의지의 말로 편
                       지를 하여 동 학원에선 이 원군의 독지에 감격하여마지않을뿐더러 일반에선 칭찬과 감사의 한

                       화제가 되어 있다. 이에 혜택을 받을 아동에게는 얼마나 한 서광이 빛이랴! 보아라. 쌍수를 거
                       하야 군호를 늘려 감사를 올리는 동시 유의의 인재가 되기를 빈다. 이것이 원군에게 보은이 될
                       것이다.








                       Ⅲ. 마무리





                        일제강점기의 오산사람들의 삶은 매우 다이내믹했다는 점이다. 첫 번째 기사에서 보듯이 의
                       병 활동이 오산에서 더욱 활성화되었다는 점이다. 오산이 활동의 중심이었다는 점인데, 오산지

                       역의 의병활동은 1907년부터 1909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오산지역에서 의병들의 활동인 1907년
                       의 오산역 습격사건, 1908년 3월 원동 일본인 마을을 습격하여 일본인 살해 등 많은 활동이 있

                       었다. 이 의병 활동은 1909년에 문시면의 의병장 안춘경이 체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의병 10
                       명이 일본군 1명을 이기지 못하는 빈곤한 무장력이었지만 민중들에게 철저한 민족적 각성을 불
                       러일으킨 점에서 민중운동사에서 가장 뛰어난 운동으로 평가된다. 이 당시에는 비 피해가 자

                       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비로 1908년, 1922년에 오산철교가 끊어져 경부선 열차의 운행
                       이 오랜 기간(복구 추정 4~5일이나 완전한 복구 추정은 몇 달이 걸릴 예정) 멈추기도 하였다.
                       1913년에는 현 성호초등학교인 오산공립보통학교가 개설되었으며, 1922년에는 오산주민과 함

                       께 윤씨 종중에서 삼미의숙을 세웠는데, 현 삼미초등학교가 이 학교이다. 1928년에는 비가 23
                       개 월동안 오지 않아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1912년에는 오산우편소가 청호면 오산에 설치
                       되기도 한다. 축구대회가 오산-병점팀, 오산-서정리팀 간에 열리기도 하였다. 이 당시에는 화

                       재사건도 빈발하였으며 가장 많은 보도 건수를 보인다. 오산역의 합동운송점의 사장과 직원 간
                       의 갈등으로 사직 공방이 일어나 홍역을 치루기도 하였다. 1929년에는 오산천 개수 공사가 있

                       었으며, 한편 1929년 오산에서 별나라사오산지사, 신간회오산지회, 오산청년동맹, 조선, 동아,
                       중외신문 3지국 주최 하에 어린이날 기념식을 개최하기도 한다.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 선생
                       이 일제강점기 때 제정하였다. 오산-발안 간 도로의 개설도 이루어졌음이 기사에 보인다. 오

                       산시장(오산장)은 수원군에서 제일가는 시장으로 교통이 사통팔달 뻗어있고, 거래 내객이 많은




                       254  김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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