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7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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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이나 그 당시 주민들이 쉴 곳이 없었다. 오산하천개수공사를 시작하여 1929년 6월 13일에 한
재구제사업이 끝나게 됨에 11,000여 평의 공지가 생겨 오산에 공원을 설치할 것을 건의한다는
기사도 보인다. 간혹 주민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 오산의원 등 병원에 입원했다는 기록이 있는
데, 병원도 개설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오산보강의원장 강대식은 무료시술과 친절 그리
고 할인된 진료비를 받아 칭찬이 자자하였다. 경성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무수학 무
산아동들을 대상으로 한글무료강습회도 연다. 또, 일제경찰은 언론지국을 압수수색하는 등 조
선인의 동향을 감시하였지만 혐의를 잡지 못했다는 기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주민들의 독립
운동 등 일제를 거스르는 동향을 감시하는 눈을 늘 주민들에게 주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30
년대가 되면 오산의 사회단체의 행사를 금지하는 일제의 강압이 눈에 띄다가, 점점 시간이 흐
르면 흐를수록 주민과 단체를 탄압하는 일제의 강압정치는 더욱 심해진다. 1932년이 되면 오
산에 제2금융조합이 설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금융거래도 많아진 것으로 추정된
다. 1933년에도 큰 물 피해를 당하여 오산보통학교와 우시장(현 싸전시장) 부근 가옥도 모두 침
수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1934년 오산-안성 간의 도로가 지극히 불편함을 오산여관에 주민과
유지들이 모여 도 당국에 진정하기도 한다. 결국에는 1937년에 개설된다. 1935년이 되면 오산
체육회가 창립되며 체육의 활성화에도 기여한다. 극빈 아동에게는 학자금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 당시 오산인들도 현재의 오산인들처럼 마을과 가정, 공동체의 단합을 위해 힘을 합하여 나
라를 찾으려는 의식이 주민 모두의 내면에 잠복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40년 이후가 되면
신문, 잡지의 기사의 수가 갑자기 줄어 일제의 탄압이 날로 늘어 보도도 용이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오산인의 삶도 피폐되어 가고 있다고 봐진다.
일제강점기 신문과 잡지 기사로 보는 오산인의 삶 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