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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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모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대부분이고 독산성의 형태나 보수 등에 관한 기록은 아래와 같이
일부만이 확인된다.
『朝鮮王朝實錄』宣祖實錄
① 선조27년 9월19일
京畿觀察使柳根馳啓曰: "水原 禿城山城修築事, 今月十一日始役, 十四日畢役。 參商事
勢, 訪得民情, 禿城城內, 募入人民, 中設倉廒, 以爲積粟之計,…(후략)…
② 선조27년 11월 19일
…(전략)…修築舊城, 據險鍊兵等事, 一如禿城之例, 應募者亦多。…(후략)…
③ 선조27년 12월 2일
…(전략)…修築舊城, 據禿城、海州因舊修築之比。…(후략)…
④ 선조28년 10월 27일
…(전략)…近日水原 禿城, 城堞粗就, 而又設砲樓, 民之來見者, 頗有守城之意云。 此亦
民心, 見其所恃, 則稍定之一驗也。…(후략)…
⑤ 선조29년 4월 17일
四道都體察使柳成龍啓曰: "水原 禿城, 則城堞已修, 器械粗完, 故一府之民, 皆有定志,
時方以私力, 蓋造廬舍, 欲爲入處者甚多。…(후략)…
⑥ 선조29년 5월 2일
"禿城山城, 軍器之中, 他餘物件, 則雖未大備, 粗得成樣, 而火藥則只有四兩, 臨急應
用, 決不可望, 實非細慮。 令該司, 急速優送。…(후략)…
각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성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경기 관찰사 유근
이 백성들과 함께 옛 성을 어느 정도 수축하고 내부에 식량창고를 축조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
으며, 당시 백성들이 성내에 거주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당시 독산성은 성으로서의
기초적인 형태만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조선왕조실록 ① ~ ③) 하지만 1년 뒤에 독산성
에 여장과 포루가 축조되고 화포 등이 배치되면서 점차 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춰나가고 있으며
12)
전쟁 중에도 지속적인 정비가 이루어 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조선왕조실록 ④ ~ ⑥)
12) 독산성에 여장과 포루 등을 축조하고 성으로의 면모를 갖추도록 수축한 것은 화성지와 수원군읍지의 기록을 보
면 변응성에 의한 것으로 판단된다.
독산성과 세마대지의 변천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