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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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보수가 진행되었다. 특히 전란 이후인 1602년 변응성의 대규모 보수 및 수축을 통해 석성
                       으로 개축되고, 여장과 포루를 갖추는 등 진정한 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면서 경기남부 방어

                       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1792년 정조에 의해 다시한번 대규모 보수 및 수축이 진행되고 내부에 운주당, 진남루,
                       관청, 보적사, 장대 등 000칸의 관청건물이 들어섰고 민가도 200호에 달하는 등 독산성의 최

                       전성기를 맞게 되며, 경기남부 방어의 핵심적인 역할과 함께 현륭원을 외호하는 역할도 함께
                       맡았다.
                        한편, 조선시대 독산성에 대한 기록은 성의 규모와 내부시설물의 규모와 배치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성의 형태에 대해 어느정도 추정은 가능하지만 도면 등이 남아있지
                       않아서 당시 성곽과 성문의 형태, 건축물의 형태 및 배치 등에 대해서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

                       어 독산성의 원형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Ⅲ.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독산성에 대해서는 1914년 독산성 내 주민들에 대한 疏開令이 있었고 그 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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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이 쇠락하였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  다만, 소개령 이전에 제작된 지적원도(1912년)를
                       보면 성곽 내부에 종교용지와 전, 대지 등이 표기되어 있어 1912년까지도 내부에 주민들이 생
                       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1918년에 발행된『五萬分之一地形圖』에 독산성에 성곽과 사찰

                       의 표시가 되어있어 주민들이 소개된 이후에도 사찰은 운영되고 있으며, 육안으로 성곽을 확
                       인할 정도 였음을 알 수 있다.
















                       23) 오산시사편찬위원회, 2009, 『오산시사』, 오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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