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2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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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卽鎭南樓, 而昔年登臨之所也。 今聞修葺云, 當製下碑文。 原任閣臣中, 左相書進。"
『輿地圖書』水原部邑誌
② 城地
…(전략)…독성산성 둘레 5리, 성첩 303첩, 높이 3장…(후략)…
조선왕조실록 ⑦의 기록을 보면 성곽을 신축한 부분이 730보로 전체 성곽의 약 72%에 해당
한다. 이는 성을 새로 신축한 것에 버금가는 보수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독산성
내에 수문이 3군데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문의 경우 후술하겠지만, 현재는 2군데만
남아있어 조선시대의 모습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옛 터에서 3척 옮겨 다시 세운
남장대는 진남루로 추정되는데, 이는 진남루가 1602년 성의 남쪽에 건립되었으며 1790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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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14년)에 개건되었다는 기록 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2년의 차이가
있는데, 1792년(정조16년)의 기록은 독산성의 수축이 완료되었음을 보고하는 것으로 남장대의
개건은 1790년에 완료가 되고 나머지 부분에 대한 보수가 완료된 1792년에 함께 보고되어 화
성지의 기록과 2년의 차이가 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1792년 대규모 보수 이후 조선왕조실록에서 독산성에 대한 보수 기록은 1804년(순조4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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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문을 설치 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수원부읍지와 화성지, 수원군
읍지 등 지리지와 만기요람 같은 서적에서 독산성의 규모와 내부시설에 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표1 참조)
독산성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된 화성지의 기록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독산성의 규
모는 둘레 1010보(1,212m)이고 시설물은 성첩 309첩, 성문 4개, 암문 1개, 수문 3곳이다. 그
리고 내부 건물은 운주당, 삼문, 진남루, 장대, 관청 등 약 168.5칸이 있었으며 민가는 120여
호 달하였다. 성의 규모에 비해 많은 수의 관청과 민가가 내부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당시 독산성의 위상과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라고 판단된다.
한편, 정조시대의 기록에서 주목할 점은 임진왜란기는 독산성의 축성이나 여장과 같은 시설
물과 내부 건축물의 축조 등이 중점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면, 정조시대를 기점으로는 성의 둘
20) 『華城誌』山城 禿城 鎭南樓
…(전략)…正宗庚戌因 特敎改建…(후략)…
21) 『朝鮮王朝實錄』 純祖實錄 순조4년 10월30일
…(전략)…禿城南設暗門也, 陽山東麓及禿城東門加植也,…(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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