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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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는 사적 제140호(1964년 8월 29일 지정)로 지정되어 있다. 성곽의
길이는 1,095m이고 성문은 동서남문과 암문 1개를 포함하여 총 5개가 있으며, 치는 8개가 있
1)
2)
다. 해동지도 와 화성지 의 기록에 의하면 남문과 서문에 문루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3)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성내부에도 운주당을 비롯하여 다양한 관청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5)
4)
는 정상부에 세마대 와 동문 안쪽에 보적사 만 남아있다.
독산성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임진왜란과 그 이후에 경기남부를 방어하는 요
충지로서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정조 때는 현륭원을 외호하는 역할 하는 등 조선후기 중요한
성곽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독산성은 지리적인 위치를 볼 때, 삼국시대부터 관방시설 존재
6)
했을 것으로 판단 되고 조선시대 다양한 개보수로 인한 당시 성곽 축조 및 보수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단서를 갖고 있다.
7)
하지만 독산성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이러한 연구 미흡은 독산성에 대한 자
료가 문헌기록만 있으며, 현재의 성곽도 현대의 보수로 인해 원형을 파악하는데 장애물이 되
고 있다. 또한 문헌기록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고고학적 조사도 1982년 서문과 암문 간이발굴 8)
1) 『海東地圖』
2) 『華城誌』
3) 주2)의 책
4) 현재 남아있는 세마대는 1957년 세마대중건위원회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현판에는 ‘洗馬坮’라고 이승만 대통령
의 휘호가 있다.
5) 보적사의 창건연대는 삼국시대 독산성의 승전을 위해 건립되었다는 설과 고려시대에 건립되었다는 설이 있으
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독산성 전투 당시 승군이 함께 싸웠다는 기록과 화성지에 기록된 독산
성 건물지 현황에 보적사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임진왜란을 이후에는 보적사가 독산성 내에 있었던 있었
던 것으로 판단된다.
6)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 기록된 독산책을 독산성으로 비정하는 연구가 있으나, 이는 낙랑의 위치 등을 볼
때, 다른 지역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독산성의 현재 지리적인 입지를 볼 때 삼국시대에 관
방시설이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7) 정해득, 2009,『正祖時代 顯隆園 造成과 水原 移邑 硏究』, 경기대학교 대학원.
심승구, 2012,「임진왜란 중 독산성 전투와 그 역사적 의의」,『한국학논총』37, 국민대학교한국학연구소.
김준혁, 2015,「독산성의 역사와 군사문화적 의의」,『오산 독산성 학술대회』, 오산시청.
8) 1982년 보수 시 서문과 암문에 대해 간이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으나 보고서 등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조사내용
과 결과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독산성과 세마대지의 변천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