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0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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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임진왜란 이후인 1601년(선조34년) 윤두수가 경기 독성 방어책에 대하여 상차한 것 을 계
기로 독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개보수가 진행된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당시 개보수에 대하
여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약 200여년 뒤에 만들어진 화성지와 수원부읍지 등
에 당시 개보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 이를 통하여 개보수의 규모와 독산성의 모습을 유추
해 보고자 한다.
『華城誌』山城
① 禿城
…(전략)…上命 本府府使 邊應星 築城仍建廯宇…(후략)…
② 鎭南樓
…(전략)…築其城使高 鑿其溝使深 浚井使民不渴 耕田使民不饑荒…(중략)…城中居民亦過
二百戶 寺刹廯宇並百餘區…(후략)…
『輿地圖書』水原部邑誌
① 山川
…(전략)…독성산 부에서 남쪽으로 10리에 있으며 만력 30년 임인년에 석성을 쌓았다.…(후
략)…
화성지의 기록을 보면 부사 변응성이 독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를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
14)
다. 보수의 내용을 보면 성을 석성 으로(수원부읍지 ①)높게 쌓고 해자로 추정되는 도랑을 설
치하였으며, 관청건물을 축조하고 독산성의 취약점인 식수를 해결하고자 깊은 샘과 둔전의 역
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밭을 만들었다. 이러한 대대적인 보수의 결과 성내 주민이 167호
에 달했으며, 사찰과 관청 건물이 약 100여구에 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화성지 ① ~ ②)
13) 『朝鮮王朝實錄』 宣祖實錄 선조34년 3월17일
…(전략)…前有累次操鍊而設險, 亦得禿城之地。 臣之妄意, 若設兵營, 以文武中重望之人差送, 以備邊司屯田幾千
石穀, 分番敎養, 民不改聚, 兵皆土着, 皆成手下之使, 坐收澤潞之效, 聞變而趨, 何往不可?…(후략)…
14) 1602년 보수 시에 석성으로 쌓았다는 기록은 마치 이전의 독산성을 토성으로 판단하게 한다. 하지만 이미 1595
년에 여장과 포루가 축조된 것으로 볼 때 이전에도 석성 이였지만, 전쟁 중 단기간에 수축을 진행했기 때문에 전
구간을 석성으로 쌓지 못하고 일부 구간이 토성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1602년의 석
성으로 쌓았다는 기록은 이러한 구간까지 모두 돌로 쌓아올린 것에 대한 기록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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