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9 - 오산문화총서 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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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물은 대부분 파괴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후에 설치된 안내판에 규모나 시설물에 대한
것이 기록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33)
1979년 이전 독산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세마대의 복원이다. 현재 독산성 최정상부
34)
에 있는 세마대는 1957년 ‘세마대중건위원회’에 의해 복원 되었는데 정부와 시민 등 각계각층
35)
의 보조금 으로 건립되었으며 특히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모금활동 등이 활발하였다.
세마대가 1957년에 복원되면서 당시 보적사만 있던 독산성 내부에 새로운 시설물이 하나 더
36)
들어 서게 되었다. 비록 복원된 세마대의 위치 와 형태에 있어서 고증 등 문제점이 지적되었
37)
지만 , 시민들이 자발적·주도적으로 독산성의 역사를 복원하고자 한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한편, ‘세마대 중건기’에 독산성의 당시 모습에 대한 기록이 일부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은 다
음과 같다.
『세마대 중건기』
… (전략)…한일 합병 후 왜인은 세마대를 파괴하고 주거민은 각처로 분산되어 현대는 보적
사와 폐허로 된 황성과 성문만이 남아 있다.… (후략)…
이 기록을 볼 때 당시 독산성에는 보적사와 성문, 일부 성곽만이 잔존하고 있고 다른 시설물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전술한 내용과 맥을 같이 한다. 또한 안내판의 설치와 같이 古蹟으
로 인식은 되고 있었으나 ‘폐허로 된 황성’의 기록을 볼 때 관리는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복원된 세마대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이 확인되었는데 1957년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기
까지 세마대도 여러차례 보수가 진행되면서 잡상과 단청 등이 원래의 모습과 다른 형태로 변
형되었다.
먼저 잡상의 경우 세마대가 복원되고 1년 뒤인 1958년에 촬영된 ‘禿山洗馬坮雅會’의 사진을
33) 복원된 세마대는 전면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형태이고, 현판은 2개가 있는데 그 중 ‘洗馬坮’라고 이승만 대통령
의 친필 휘호이다. 그리고 내부에 ‘세마대 중건기’와 ‘세마대 중건 경위서’가 걸려 있다.
34) 2016년 보수공사 중 지붕해체를 통해 세마대의 상량식은 1956년 5월 10일에 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35) 세마대 건립비용과 관계자, 작업 등에 대해서는 현재 세마대에 ‘세마대 중건 경위서’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36) 세마대가 현재의 위치에 복원된 것은 중건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전략)…초석만 남은 옛 터에 단기 四二九0年 八월 十五일 독산성 세마대 고적 중건 위원회의 …(중략)…세마대는
중건 복구되었고…(후략)…
37) 주)10의 보고서.
독산성과 세마대지의 변천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