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 - 오산문화 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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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VOL. 64 osan culture
로 해석해야 한다. 독산성에 있는 보적사는 백제시대의 절이었으나 고
려시대에 수축되었다고 전한다. 어느 해 흉년이 들어
1) 독산과 구천 굶어 죽는 백성이 많은 해였다. 이때에 보적사 경내의
백제초기의 역사에 등장하는 독산과 구천의 역할 바위틈에서 쌀알이 물처럼 솟아 나와 굶주린 고을 백
은 토경 방어의 목적이었다. 낙랑과 말갈의 침입 성을 구제하였다. 그래서 절의 이름이 보적사(報積寺)
라고 칭명하였다고 한다.
을 경계하여 독산과 구천에 책(柵)을 세웠다는 것
오산시청 홈페이지가 기록하는 ‘보적사’에 대한 내
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력은 다음과 같다.
온조왕 2년 3월, 말갈(靺鞨)의 침범을 경계하여 병기
보적사(寶積寺)는 현재 독산성(禿山城) 동문 안에 위
(兵器)를 수선하고 양곡(糧穀)을 비축하였다. 3년 9
치하고 있으며, 창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월, 말갈(靺鞨)이 북쪽 토경을 습격하였다. 8년 7월,
백제 아신왕 10년(401)에 전승(戰勝)을 기원하기 위하
위례성의 북쪽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
여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柵)을 세워 낙랑(樂浪)과 불화(不和)하였다. 10년 10
‘보적사’라는 명칭에는 재미난 유래가 전해지는데 옛
월, 말갈이 북쪽 토경을 습격하였다. 11년 7월, 독산
날 삶이 궁핍한 노부부가 쌀 두되만 남게 되자 구차
(禿山), 구천(狗川)에 책(柵)을 구축하여 낙랑과의 통
하게 굶어 죽느니 부처님께 공양하기로 마음먹고 공
로를 막았다.
양 후 집에 돌아오니 곡간에 쌀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이후 열심히 공양하면 보화가 쌓이는 사찰이라
위의 기록에서 책(柵)의 의미는 나무 울타리 또는
하여 보적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토성으로 쌓은 성책(城柵)이다. 설명을 덧붙이면
독산에 토성을 쌓고 구천(황구지천)을 해자(垓字)
위의 기록에서 공통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
로 삼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원시 고색동에는
는 독산 보적사는 백제시대의 절이라는 것이다.
황구지천을 따라 길게 쌓았던 토성이 남아있다.
그 둘은 독산 보적사에는 쌀을 비축하였다는 것
그러므로 이 마을의 이름은 지금도 고색동(古塞
이다. 독산은 그 이름 그대로 쌀독을 두었던 독산
洞)이다. 고색이란 ‘오래된(古) 요새(要塞)’를 의미
이었다는 것이다.
한다.
이 사료에 근거하면 독산책은 낙랑과 말갈의 침입
3) 독산성 세마대 전투
을 경계하여 쌓은 성책이며 독산책에는 군량(軍
오산시청 홈페이지가 기록하는 ‘독산성’에 대한 내
糧)을 쌀독(禿)에 비축하였던 것이다.
력은 다음과 같다.
2) 독산 보적사의 유래
독산성(禿山城)은 백제시대 쌓은 것으로 성 둘레가
화산 용주사가 기록하는 ‘용주사의 말사 보적사’
1,100m이고 오산과 수원, 화성의 평야 한가운데 솟아
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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