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 - 오산문화 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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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이야기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의 조운제도를 그대로 이 3. 국난극복의 성지 독산
어갔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왜구의 약탈이
잦은 남해안의 부산포 등의 조창을 폐쇄하였 1) 정조임금이 사랑한 독산
다. 서해안의 예성강 어구에서 남해안의 섬진강 정조임금은 독성산성을 수리하고 나서 독산의 토
어구까지 모두 9개의 조창을 설치 운영하였다. 지신(土地神)에게 올릴 제문(祭文)과 비문(碑文)
고려시대 오산지방에서 거둔 조세는 황구지천과 을 직접 지어 내렸다. 그리고 경기도 관찰사인 수
아산만, 서해를 이용하여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 원도호부의 부사에게 해마다 제향하게 하였다.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 노선이 정조임금은 무슨 까닭으로 수원고읍성을 아버지
폐지되었다. 오산지방에서 거둔 조세를 강과 바 사도세자의 유택 현융원으로 삼았는가? 또 무슨
다를 이용할 이유가 없어졌다. 조선의 수도가 개 까닭으로 독산의 토지신에게 해마다 제향하는 일
성(開城)이 아니라 한성(漢城)이었기 때문이었다. 을 수원유수에게 교지하였는가? <기전영지>와 <
우마차의 수레를 이용하여 곧바로 도성 한성으로 정조실록>은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운송하였다. 수원의 지지대고개를 넘어 과천을 거
쳐 한성의 경창으로 운반하였다. 정조대왕의 화 독성려왕릉은 수원도호부 남쪽 삼십리에 위치한 독
산능행차의 길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산성에 있다. 경진년 장헌세자(사도세자)께서 온양
온천 행차 시 산성에 이르렀을 때, 군
장 이두환이 이곳에 어떤 고적이 있다
고 아뢰었다. 장헌세자께서 산성의 진
남루에 오르자 군장 이두환이 그 일에
대하여 아뢰었다. 본부 중 진남루 아래
의 산기슭을 가리키며 이곳에 한 개의
큰 무덤이 있는바 옛 부터 여왕릉이라
불린다 하였다. <기전영지>
정조 14년 2월, 독성산성에 행차해서
장대에 임하고 운주당(運籌堂)에 이르
러 산성의 부로(父老)를 불러 위로하였
다. 상(上)이 경진년 온행(溫幸,온양온
천행)중에 독성에 들러 운주당에 숙소
를 삼고 진남루에 하림(下臨)하여 활을
쏘니 연달아 네 화살이 맞았다. <정조
실록>
동비여고의 禿山과 串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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