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오산문화 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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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이야기
임진왜란 중인 선조 25년(1592) 전라도 순찰사 권율 남아있다. 그리고 오산시 지곶동과 갈곶동에도
장군이 독산성에 주둔하며 왜군 수만 명을 무찌르고 그 이름의 뿌리가 고스란히 살아있다.
성을 지킴으로써 아군이 경기지역으로 북상할 수 있
도록 하였으며, 이후에도 도성을 방어하는 큰 축을
1) 수원고읍성의 곶산
담당하였다.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의 묘소가 마련된 수원고읍
현재 성내에는 국가사적 140호인 세마대지(洗馬臺地)
성의 진산은 곶산(串山)이다. 수원의 옛 치소였던
가 있는데 “화성지(華城誌)”에 의하면 왜군이 독산성
수원고읍성은 마한 모수국(牟水國)의 도읍지로
에 물이 부족함을 알고 성을 포위하자, 권율장군이
전해진다. 마한(馬韓)은 BC 1세기∼AD 3세기경
말을 산위로 끌고 가 쌀로 씻기는 시늉을 해보여 왜
한강(漢江) 유역과 충청·전라도 지역에 분포되어
군이 물이 풍부한 것으로 속아서 물러났으며 이후 그
있던 여러 정치 집단의 통칭이다. 《삼국지》 동이전
곳을 세마대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에는 마한지역에 위치한 54개 소국(小國)의 명칭
이 열기되어 있는데, 큰 것은 1만여 가(家), 작은
이 기록에도 어김없이 쌀이 등장한다. 독산성에
것은 수천 가였다고 한다. 고산 윤선도는 곶산이
물보다 많이 비축되어있는 것이 쌀이었다. 군량미
위치한 수원고읍성이야말로 국중(國中)의 명당(明
로 비축한 쌀이 쌀독에 넉넉하였다는 것이다.
堂)이라고 지적하였다.
2. 수원고읍성의 진산 곶산(串山)
2) 지곶동(紙串洞)과 갈곶동(葛串洞)
수원고읍성(水原古邑城)의 진산은 곶산(串山)이 황구지천에 접한 오산시 지곶동은 종이를 조세
다.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이 수원고읍성터 (租稅)로 공납하던 포구를 가리킨다. 닥나무로 만
이다. 든 한지를 중앙정부에 공납하던 마을이라는 의미
곶산의 의미는 한마디로 포구를 내포한 지형을 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지곶동(紙串洞)이다.
의미한다. 삼면이 바다 또는 호수로 둘러싸인 삐 진위천에 접한 갈곶동은 갈포(葛布)를 조세(租稅)
죽한 땅으로 등대가 설치된 곳이 많다. 장산곶, 로 공납하던 포구를 가리킨다. 칡덩굴로 만든 갈
호미곶 등이 그것인데 쌀과 특산물 등의 조세를 포지를 중앙정부에 공납하던 마을이라는 의미이
중앙정부에 공납하던 포구가 딸려 있었다. 다. 그래서 마을의 이름이 갈곶동이다. 지곶동과
조선 정조가 곶산에 부친 사도세자의 능침을 마 갈곶동은 곧 곶산에 딸린 내륙 수로의 포구였음
련하면서 곶산(串山)의 명칭은 우리말의 소릿값인 을 의미한다.
꽃산(花山)으로 개명되었다. 지금은 꽃산 대신 화 황구지천과 진위천의 합수머리에 사창터가 존재
산으로 통용된다. 한다. 화성시 양감면 사창리의 사창(私倉)이다. 고
곶산(串山)이 꽃산(花山)이 아니었음은 17세기 후 려시대 수원, 화성, 오산지방에서 거둔 세곡을 도
반에 제작된 <동비여고> 속 수원지방도에 뚜렷이 성 개경(開京)으로 운반할 목적으로 세워진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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