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 - 오산문화 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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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VOL. 64  osan culture






                       정조 16년 7월, 독성산성을 수축(修築)하고 토신(土              고구려의 매홀(買忽), 신라의 수성(水城)으로 불
                       神)에게 고유(告由)토록 하였다. 고유제품(告由祭品)               리웠다.
                       과 제문(祭文)의 격식을 정하여 부사(府使)가 헌관                고려시대 오산시 지곶동과 갈곶동은 조세를 납부
                       (獻官)이 되고 중군(中軍) 및 부내(府內) 당상관(堂上             하던 포구로 이해하여야 한다. 지곶동은 종이를
                       官)이 추천한 조신들이 다음 헌관이 되었다. 향(香)과              현물로 납세하던 마을로 이해하고 갈곶동은 갈포
                       축문(祝文)인즉 향관(香官)이 경기감영(京畿監營)에
                                                                   를 납세하던 지명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전하고 경기감영 정문찰방(定文察訪)이 대축관(大祝
                                                                   조선시대 정조임금은 독산(禿山)을 향로봉(香爐
                       官)을 겸(兼)해서 이 행사를 치렀다. <정조실록>
                                                                   峰), 곶산(串山)을 꽃산(花山)으로 바꾸어 불렀다.
                                                                   독산을 향로봉으로 부른 것은 사도세자의 영면을
                       정조 16년 10월 교지(敎旨), 산성(山城)은 중(重)한 땅이
                                                                   위한 정조임금의 효심이었다. 곶산이 화산으로 바
                       요 원침(園寢)에 가깝고 또 경진년에 주숙(駐宿)하던
                                                                   뀐 것은 강과 바다를 이용하던 조운제도가 쇠퇴
                       처소이다. 장대(將臺)는 곧 진남루인데 전년(前年)에 등
                       림(登臨)하던 곳으로 지금 수축한다하니 마땅히 비문                하였다는 의미이기도하다.
                       (碑文)을 지어 내릴 것이되 전임(前任) 규장각신(奎章              우리 고장의 독산은 군량과 조세를 보관하던 쌀
                       閣臣)중에서 좌상(左上)이 지어 올리라. <정조실록>               창고로 이해하여야 한다. 독산책의 구축, 보적사
                                                                   의 유래, 세마대의 전투 등이 그 증거다. 독산의

                       2) 국난극복의 성지 독산                              기본적인 의미를 ‘쌀독의 독산’으로 이해하여야 한
                       선사시대부터 오산시의 중심은 독산이었다. 독산                   다. 간장, 된장, 고추장의 장독과 쌀독, 술독, 김칫
                       주위의 금암동과 양산동, 세마동과 지곶동이 그                   독의 독, 독산(禿山)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선사
                       중심이었다. 그 까닭은 독산을 감아 도는 황구지                  이대 이래 쌀을 비롯한 모든 곡물은 흙으로 빚은

                       천 주변이 수렵생활을 하기에 매우 좋은 터전이기                  독에 담아 보관하였던 것이다.
                       때문이었다. 오산시 금암동과 외삼미동에 존재하                   또한 독산을 국난극복의 성지로 이해하여야만 한
                       는 고인돌 유적이 그 사실을 대변한다.                       다. 임진왜란 때의 독산성 세마대 전투가 이에 해
                       외삼미동에 존재하는 북방식 고인돌에는 16개의                   당한다. 거기에 더하여 산신(山神) 제의(祭儀)의 독

                       별자리가 새겨져 있어 특별하다. 금암동에 존재                   산으로도 이해하여야 한다. 조선 정조임금도 원침
                       하는 남방식 고인돌에는 고인돌을 떼어내던 흔적                   (현융원)에 가까운 독산을 향로봉으로 부르며 귀중
                       이 뚜렷하여 특이하다.                                한 땅으로 여겼다. 그래서 비문(碑文)과 제문(祭文)
                       삼한시대 우리 고장 오산은 마한 54국의 하나인                  을 지어 내리고 수원부사로 하여금 해마다 독산의

                       모수국(牟水國)의 터전이었다. 그 중심은 황구지                  토지 신에게 제향(祭香)을 올리게 하였던 것이다.
                       천을 내포한 독산(禿山)과 수원고읍성터인 곶산                   오산독산성문화제의 개막은 독산성 세마대에서
                       (串山)이었다.                                    고유제(告由祭)를 지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삼국시대 우리 고장 오산은 백제의 구원(狗原),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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