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렵지만, 산제당에 있었던 두 그루의 소나무는 1950년대에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당 주변은 신목
인 참나무를 중심으로 지름 5미터 정도 부분이 평평한 대지를 이루고 있다. 터줏가리는 높이가 약 50
센티미터 정도로 작은 편이다.
당우물은 아리랑가구 공장 뒤편에 있는 민가의 바로 아래쪽에 있다. 당우물은 민가의 바로 아래 논
구석에 있는 자연우물로, 지름 약 1미터 정도 크기이다.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으며, 산신제를 지낼 때
만 우물을 청소하고 물을 뿜어 낸 후 이물로 제물을 장만한다.
우물제사는 음력 7월 1일에 지낸다. 제사를 지내는 우물은 가장동 큰말에 있는 대동우물로 물이 맑
고 많아 생활용수로 써 왔다. 지금도 자동집수시설을 만들어 상수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물의 집수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플라스틱 건축자재로 창고형태의 집을 지어 놓았다.
산신제와 우물제사의 제물은 산신제 때 통돼지를 올리고, 우물제사 때 소를 잡아 올리는 것을 제외
하고 나머지는 동일하다. 그러나 현재는 산신제 때 여전히 통돼지를 잡아서 돼지머리를 올리고 있지
만, 음력 7월 1일의 우물제사 때는 통소 대신 소머리를 올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소를 장만하는 비용
이 너무 부담스러워 쇠머리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물제사 때 통소를 잡아 올리는 관행은 항
상 그대로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농사의 풍흉이나 마을의 경제적 형편에 맞추어 소를 잡아 올리기
어려운 해에는 돼지를 올리는 것으로 대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음력 7월 1일의 제사에는 소
를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제물로 올리는 소나 돼지는 마을 안에서 소나 돼지를 기르는 집에 미리 맞추기도 하고, 외부에서
구입해 오기도 했다. 1980년대 이전까지는 마을 안에서 소를 잡아 고기를 나누었다. 이때 소를 잡고
내장을 꺼내는 작업은 외부에서 전문 도축인을 불러다 했다. 가장동 사람들은 이 사람을 ‘하인’이라고
불렀다 한다. 외부의 도축인을 하인으로 불렀던 것은 도축일에 종사했던 백정이 천한 신분으로 인식
되던 전근대적 잔재가 남아 있었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이후부터는 마을 안에서
도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를 구해서 도축장에 가져다주어 잡아오게 하였다. 잡은 소는 부위별로
잘라내지 않고 내장만 꺼낸 채 그대로 가져와 제사를 지냈다.
소를 구입하는 비용은 마을기금을 사용했다. 우선 마을기금으로 소를 구입하고 나머지 제물을 구
입하였는데, 이 마을기금은 가을 산신제때 각 가구마다 추렴해 보태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을기금이
나 부분적인 추렴만으로 소의 구입비용을 충당하기는 어려웠다. 부족한 비용은 마을사람들이 우선
소고기를 나눠 먹고 가을 추수 후 내는 돈을 받아 메웠다.
산신제와 우물제사를 지내는 제관은 조라라고 불렀다. 조라는 산신제의 제물을 장만하고 제를 지
오산시사 내는 당주이다. 조라 외에 심부름을 하는 소임 두세 명을 더 뽑는다. 조라는 그해에 부정이 없는 깨끗
한 집으로 선정한다. 몸이 불편하거나 다친 사람은 조라가 될 수 없다.
떡과 나물 등의 제물은 조라의 부인이 장만하고, 제사에 올리는 술은 하루 전에 누룩과 쌀밥을 지
제
6 어 묻어 두었다 걸러서 사용한다. 이것을 식혜라고 한다.
권
산신제를 지내는 제당에는 조라와 심부름꾼 등 몇 사람의 남성들만 올라가서 지낸다. 제사는 산신
제나 우물제사 모두 동일한 순서로 진행된다. 우선 조라가 먼저 술을 한 잔 올리고, 축문을 읽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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