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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1679년(숙종 5) 2월 29일 타개하니 묘를 인주(仁州) 황등천(黃等川)의 언덕에 썼으나, 1703년
(숙종 29) 수원 부산리(현 오산시 부산동) 북동쪽 언덕으로 이장하면서 부인 덕수 이씨와 합장하였다.
공의 묘갈명은 성리학의 거두이며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지었고, 생질이며 가선대부 예
조참판이었던 이건명(李健命)이 썼다. 공의 묘비는 1712년(숙종 38)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부산동의 개발과 함께 공의 묘 또한 사라져 버렸다.
참고문헌
尤庵集, 宋子大全, 오산시사 2009.
61. 홍수주(洪受疇)
1642년(인조 20) ~ 1704년(숙종 30)
조선시대 문신이며 선비화가로 본관
은 남양(南陽)이다. 자는 구언(九言),
호는 호은(壺隱)·호곡(壺谷)으로 황
해도 관찰사 처윤(處尹)의 넷째 아들로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682년(숙종 8) 문과에 급제하였고,
정헌·헌납 등을 거쳐 예조좌랑을 지
세교동 홍수주 묘 내고, 1684년(숙종 10) 장령으로 재직
중 파직되어 경흥(慶興)에 유배되었다
가 덕원·철원 등으로 이배되었으나,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로 풀려나와 교리로 재 등용된 뒤 밀
양과 경원부사를 지냈다. 이듬해 동지사행의 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1696년(숙종 22) 동부승지로
원접사가 되어 청나라 사신을 맞아 능숙한 문장과 글씨로 그들의 격찬을 받았으며, 역관이 없어도 불
편이 없었다고 한다. 이해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고, 다음 해 우부승지를 거쳐 1701년(숙종 27)에는 예
조참의,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704년(숙종 30) 도승지를 거쳐 형조참판에 이르렀으며, 후
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공은 평소 회화·서예, 특히 전서를 잘 썼다. 회화는 매화·대나무·포도를 잘 그렸는데, 특히 포
오산시사
도 그림이 뛰어났다. 그의 포도 그림은 대개 나뭇가지가 위에서 아래로 둥그스름하게 휘어져 내린 도
수식 구도로 농담묵을 써 잎과 열매를 그리는 화법으로 그렸는데 입체감과 변화감이 풍부한 것이 특
제 징이다. 공의 작품은 지금도 남아 묵포도도(墨葡萄圖)와 묵매도(墨梅圖)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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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어 있고, 간송미술관에 포도도가 소장되어 있다. 공은 서예 솜씨도 대단하여 태종대왕 헌릉신도비문
은 공의 글씨이다. 문집으로 『호은집』을 남겼다. 공의 묘소는 원래 안산(安山)에 있었으나, 도시개발
358 로 인해 1979년 9월 오산시 세교동 독산성 서쪽 큰말 언덕에 후손들에 의해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