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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는데, 어느 의원이 말하기를 가물치가 제일 좋다고 하나 추운 겨울이라 냇물은 단단히 얼었지만,                                         355
                  공은 곧 석천(石川)의 옆에 가서 얼음을 깨고 가물치를 잡으려 하니 큰 가물치가 얼음 깨진 틈으로 뛰                                        구비전승

                  어나오므로 이를 어머니께 달여 드리니 과연 효험이 있어 완치되었다.
                    형제 일곱이 함께 한집에 살면서도 서로 화목하고 우의가 깊었으니 모두가 공의 화도력의 결과였                                           · 민속

                  다. 평소 향학열이 높아 열심히 공부하여 수년에 문리를 깨우쳤고, 마을에 쟁송이 있으면 공에게 먼                                          · 경기도당굿과
                  저 판별해 달라고 하여 관에 가지 아니하고 해결토록 하였으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

                  면 타일러 감화시키고 부모에게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크게 칭찬하여 주니 근동에서는 미천한 사람
                  들도 공을 따르며 존경하였다. 그러나 1799년(정조 23) 8월 5일 40세의 일기로 마감하니 인근의 수많
                                                                                                                    경기재인청
                  은 백성이 슬퍼하였다. 이러한 공의 효행이 뛰어남을 조정에서 알고 1831년(순조 31년) 7월 14일에 효
                  행과 열행을 한 유생들에게 포상하기로 예조에서 정할 때 조봉대부 동몽교관을 추증하고 자손들이

                  두곡동에 효자 정문을 세웠다. 공의 묘는 오산의 두곡동 마을 뒤에 있고, 최정린효자정문이 있다.                                            /  성씨



                  참고문헌                                                                                            · 인물

                  純祖實錄, 오산시사 2009.





                  58. 최철견(崔鐵堅)

                  1548년(명종 3) ~ 1618년(광해군 10)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응구(應久), 호는 몽은(夢隱). 검열 최해(崔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

                  희증(崔希曾)이고, 아버지는 증호조참판 최역(崔櫟)이며, 어머니는 희릉령(熙陵令) 이석(李晳)의 딸
                  이다. 1576년(선조 9)에 사마시에 합격, 1585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형조좌

                  랑·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다. 1590년에는 병조정랑이 되어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전라도
                  도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찰사 이광(李洸)이 패주하자, 죽기를 맹세하고 전주 사민에 포고하여
                  힘껏 싸워 전주를 수호하였다. 그리고 순찰사 권율(權慄)이 오산 독산성(禿山城)에서 구원을 청하자
                  의병장 변사정(邊士貞), 임희진(任希進)과 함께 달려와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이를 구하였다. 1597년

                  수원부사로 임명되고, 1599년 내자시정, 1601년에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호조참의로 전임되었다.

                    1604년에 춘천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1608년 선조가 죽자 풍수
                  지리설로 산릉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가 소를 올려 의논을 정하게 한 바 있다. 저서로는 『몽은집
                  (夢隱集)』이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상촌고(象村稿),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오산학연구 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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