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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중심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353
한편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발표되면서 선생과 오산번영회는 대형 기업체의 공장들을 오산으 구비전승
로 유치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오산은 서울 이남에서 도심과 인터체인지가 가장 가깝다는 지리
적인 이점과 수량이 풍부한 오산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군사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 민속
대형공장을 수도권 고속도로 주변에 설립하려는 기업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관건은 공장마다 · 경기도당굿과
3만~5만 평씩 하는 부지를 확보하는 일로, 선생과 번영회는 당시 한세택 오산면장과 함께 농지를 잃
게 되어 두려워하는 주민들을 지역사회 개발이라는 열정으로 설득하고 투명한 자세로 초지일관하면
서 무난히 대형 기업들을 유치할 수 있었다.
경기재인청
결국, 번영회의 헌신적인 노력과 열정,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 대성모방, 계성제지, 쌍용제
지, 미원모방, 대원화성, 금성전기 같은 대형공장들이 속속 문을 열면서, 오산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산의 경제 상황 또한 윤택해졌고, 주민들은 다른 곳에 더 넓게 대토를 마 / 성씨
련하고 자녀들을 쉽게 취업시킬 수 있었다. 선생은 1964년 경기도 도정자문위원, 대한적십자사 화성 · 인물
군대표로 1969년까지 활동하였고, 1974년 작고하여 평택시 서탄면 내천리 산 18번지 선산에 묻혔는
데 슬하에 1남 4녀의 자손을 두었다.
참고문헌
경기도사, 오산학원50년사, 오산시사 2009.
55. 처영(處英)
(? ~ ?)
호는 뇌묵(雷默). 휴정(休靜)의 제자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
난 갔을 때, 휴정은 8도의 승려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승으로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때 처영
은 1,000여 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권율(權慄)과 함께 금산 배고개전투(이치전투梨峙戰鬪)에 참여하
여 크게 전공을 세웠다. 1593년 2월 권율과 함께 북진하여 오산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진을 치고 왜
적 우키타 히데이(守喜多秀家)의 공격을 물리쳤다. 그리고 권율이 3,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였을 때, 700 승병을 이끌고 한 방면을 담당하여 적병 3만과 대전하여 2만
4,000명의 사상자를 내게 함으로써 임진왜란 이후 최대의 승첩을 거두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절충장
군(折衝將軍)이라는 직함을 내렸다. 1594년 도원수(都元帥) 권율의 명으로 의령(宜寧)에서 군사를 이
끌고 남원(南原)의 교룡산성(蛟龍山城)을 수축했다.
1794년(정조 18) 왕명으로 휴정, 유정(惟政), 처영의 진영(眞影)을 해남대흥사(大興寺)의 표충사(表
忠祠)와 묘향산수충사(酬忠祠)에 봉안하고, 관에서 춘추로 제관과 제수를 보내어 향사하게 하였다.
『금산사지』에는 그가 어릴 때에 금산사에 출가하고, 뒤에 휴정을 참방하여 선지(禪旨)를 받았다는 기
록과 함께,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국일도대선사 부종수교 보광현랑 뇌묵(國一都大禪師扶宗樹敎葆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