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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정규환(鄭奎煥) 349
구비전승
1894년 8월 10일 ~ 1961년 10월 29일
오산시 오산동 415번지에서 태어난 농민이며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25세 때인
1919년 3월 29일 오산장터 만세운동에 가담한 독립운동가이다. · 민속
선생은 오산시 세교동 출신 유진홍이 1919년 고종 황제의 국장에 참여하고자 상경하여 체류 중 3월 · 경기도당굿과
1일 서울에서의 독립만세 시위 현장을 목도하고 감격하여 오산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려고 할
때에 제일 먼저 적극 가담하기로 결의하고 김경도(金敬道), 김용준(金用準), 이성구(李成九), 이규선
(李圭璇), 안낙순(安樂淳), 공칠보(孔七甫) 등의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의 동지가 규 경기재인청
합되자 의거할 것을 모의하고 각자가 비밀리에 각 동리로 연락을 취할 것을 정하고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 준비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감시가 심하여 거사 일을 결정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 / 성씨
다, 3월 29일(당시 음력 2월 28일) 오산 장날을 기하여 거사 일을 정하고 동지들에게 각 동리에 연락
을 취하도록 하였다. · 인물
드디어 3월 29일 모두가 장꾼으로 행색을 변장한 채 경비하던 일경의 눈치를 살피며 오산장터에
모였다. 정오가 되자 정규환은 유진홍과 함께 장 복판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대한 독립만세를 삼창
하니 수백 명의 장꾼들이 일시에 호응하여 시가를 행진할 때 의기는 당당하고 함성은 천지가 진동하
는 듯하였다. 이때 황급히 일경 10여 명이 출동하여 총검으로 폭력 저지하였으나 흥분한 군중들을 막
지 못하게 되자 주모자인 유진홍, 이성구 외 5명을 체포하여 오산경찰주재소로 구인하였다. 겁에 질
린 시위 군중들은 잠시 해산하였다가 다시 오후 4시쯤 7~8백 명의 무리로 불어난 가운데 주재소 앞
에 모여 만세를 부르며 검거한 사람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우리는 조국을 찾는 사람이다. 아무 죄가 없다. 속히 석방하라.”는 함성과 구호를 외치며 만세를
부르고, 한편으로는 당시 면장 유종렬(劉鍾烈)이 만세운동에 협조하지 않음을 분개하여 죽여야 한다
고 위협하자, 인심이 흉흉해진 것을 보고 놀란 일경은 시위 군중들이 해산하는 것을 조건으로 주모자
를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정규환을 비롯한 주모자들이 석방되자 시위 군중들은 이들을 옹호하고 시
장 북쪽의 가심산(佳心山)에 올라 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계속할 때 일경이 총을 발사하여 시위 군중
4명이 중상을 입고 오산병원에 입원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위 군중들은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일본
인 주거지들을 습격하였다. 이때 일경들은 시위군중의 수가 많고 시위가 격렬해지자 헌병수비대, 소
방대의 응원을 받아 닥치는 대로 총칼로 위협하였으며, 결국 시위대는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다음날부터 일경은 주모자 색출에 혈안이 되어 10여 명을 수원경찰서로 구인하여 3주일 동안 유치
장에서 악독한 고문과 태형을 가하는 한편 일부는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선생은 주모자로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하여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61년 6월 26일 사망하였다. 국가에서는 1993년
선생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