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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창극단은 선생이 13세 무렵 부산에서 해산되었다. 13세부터 15세까지는 글공부를 했고, 345
선친의 분부로 소리재를 다듬기 위해서 통도사(通度寺)에 들어가서 100일간 독공을 했으며 스님에게 구비전승
역학을 배웠다. 15세부터 20세까지는 광무대(光武臺)를 비롯해서 단성사(團成社) 등을 따라서 평양,
함경도 등지를 유랑했고, 15세 무렵 이근호, 이판서 등과 정처 없이 떠돌았다. 20세 무렵에는 고향 · 민속
인 오산에서 농사를 지으며 장가도 들었다. 장가는 들었으나 심심해서 견딜 수 없어 대금 공부를 혼 · 경기도당굿과
자 했다. 선생이 22세 되던 무렵에 대금 공부를 통해서 잽이로서 당굿을 다녔으나 여러 가지 모자라
서 당굿을 할 엄두가 서지 않아, 부친이 숙부에게 부탁해서 당굿을 본격적으로 배운다. 숙부에게 당
굿을 배우는 6년 동안 밖에도 나가지 않고 열심히 배웠다. 숙부는 판소리가 뛰어났으며, 당굿의 절차
경기재인청
와 순서를 명확히 알고 있던 분이었기에, 선생이 정확히 경기도당굿을 전수할 수 있었다. 선생의 경
기도당굿의 특징인 선증애굿인 <군웅노정기>는 숙부로부터 배운 것이며, <군웅노정기>는 매우 어려
운 것이나 굿의 노정기, 법수, 차서 목구멍 쓰는 법 등을 자세히 배울 수 있었다. 특히 도당굿의 근원 / 성씨
인 순임금의 딸 아황과 여영에게서 굿을 터득한 것을 익히고, 선무당의 차서인 부정굿, 시루 비는 말, · 인물
시루청배, 제석굿, 제석청배 등도 아울러 익혔다. 29세 무렵에 경기도 광주에서 당굿을 하는데, 처음
도당굿에 정식으로 등단했다.
30세 무렵에 다시 창극단을 따라 나서는 한편, 틈틈이 당굿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그의 음악이 이
름나기 시작해서 지방에서 부르면 나가고, 거기에 나가서 더욱 재주를 연마하게 된다. 주로 경사가
있는 집, 환갑집, 도당굿판, 집굿 등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또한 봄철에 하체놀이에 많이 참석했는
데, 하체놀이란 장돌림의 규율을 잡고 새 접장을 뽑을 때에 열리던 모임이다. 곧 등짐장사꾼의 잔치
인데, 이때에 기생도 참여하고, 삼현육각도 잡히며 줄타기도 하는데, 악사로 자주 참석했다. 함께 따
라다닌 창극단으로는 박옥진, 박보하 형제의 삼성단체나 박후성(朴厚性)과도 다녔으며, 임춘앵(林春
鶯)과는 4년 동안 함께 다녔다.
선생은 도당굿을 하는 화랭이로 당골판을 여럿 가지고 있었으나, 산업화와 미신타파의 사회 분위
기 속에 무속이 위축되면서 입지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1980년에 역시 동일한 화랭이인 조한
춘(趙漢春)을 만나서 다시 도당굿을 활성화하였다. 선생은 도당굿을 할 때 이틀 밤을 새우며 굿을 할
정도로 정열적이었다. 열과 성을 다하여 경기도당굿의 문화적 가치를 널리 알리며 활발히 활동했으
나 그 결실을 보지 못하고 선생은 1987년 눈을 감고 말았다.
경기도당굿은 경기도 지역에서 마을의 으뜸신(都神)을 모신 당인 도당(都堂)에서 지내는 마을굿으
로 주로 정월(음력 1월)에 행해졌다고 하나 음력 3월 3일, 10월 10일에 하는 곳도 흔했다. 도당굿은 우
리나라 굿 중 가장 특이한데, 일반적인 굿은 무당(무녀)이 주도하지만, 이 굿만큼은 무당보다 세습무
가계의 남무(南巫)인 ‘화랭이’에 의해 주도되는 면이 많다. 화랭이는 전통적인 세습무가계의 남무를
지칭하는 말이며, 도당굿을 함께 주관하는 무녀를 미지라고 한다. 도당굿에서 선생은 터벌림, 손님노
정기, 군웅노정기, 뒷전을 직접 집전하는 빼어난 화랭이였다.
선생은 근대 무속의 산증인이었다. 전통적인 세습무 집안에서 나서 세습무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
고, 또한 서모인 박금초에게 판소리를 배웠으며 풍부한 창극 경험을 했다. 아울러서 악사 내지 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