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4 - 제6권
P. 344

로 길러냈다. 선생의 좌우명은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마음에
                  서 비롯된다는 뜻으로 항상 마음을 닦고 수양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가르쳤다.

                    1970년대 후반에 극심한 재정난으로 학교운영이 어려워져 태화(주)의 심금봉 회장이 오산학원 이
                  사장을 맡으며 학교가 안정되었다. 역설적으로 시민들의 힘으로 만든 오산학원이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기업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1979년부터 중학교·고등학교 통합 교장에서 오산중학교 교장이
                  된 선생은 1987년 퇴임할 때까지 36년간 오산교육의 산증인으로서 인재 양성과 후학을 길러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현재 오산에서 활동하거나 오산 출신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기둥처럼 자리 잡고 있
                  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선생의 제자이다. 선생은 오산유도회 초대회장과 오산로타리클럽 초대회

                  장 등을 역임하는 등 지역사회와 함께 오산교육을 이끌었다.



                  참고문헌

                  오산중학교50년사.





                  43. 이상재(李尙載)


                  1607년(선조 40) ~ 1636년(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부평(富平)이다.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동 출생으로 자는 문거(文擧)

                  이며, 옥(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조정랑을 지낸 계록(繼祿)이고, 아버지는 광해군과 동서지간
                  이 되는 군수 덕일(德一)이며, 어머니는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사복시 첨정 이인후의 딸을 맞이하

                  여 혼인하였다.
                    1630년(인조 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

                  문원에 등용되어 저작에 올랐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중국의 사신 학사 강왈광(姜曰廣)이 크게 존
                  경하여 시문을 받아갔는데, 이 시가 『황화집(皇華集)』-조선시대 명나라의 사신과 조선의 원접사(遠接

                  使)가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은 책-에 실려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1636년(인조 14)에 금정도찰방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도 관찰
                  사 정세규(鄭世規)의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인조가 피란한 남한산성을 방어하기 위해 진군하다 용인

                  의 험천(險川 : 지금의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에서 적의 협공을 받아 분전했으나 전사하였다. 사후에

                  홍문관 교리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추증되었으며, 충신정려각(旌閭閣)은 1815년(순조 15)에
      오산시사
                  오산시 서동 산 66번지에 세워졌다. 정려각에는 정려문과 송면재 선생이 지은 정려기(旌閭記) 현판 1
                  좌가 보존되어 있다. 한편 공의 묘소는 원래 인천의 도장리(道章里) 선영에 있었으나, 오산시 서동 산


      제           66번지로 이장되었다. 충신 이상재 행장은 공의 외손인 개성유수 송징은(宋徵殷)이 지었다.
      6
      권



    342
   339   340   341   342   343   344   345   346   347   348   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