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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에 자작농계(自作農契 : 자기 땅 만들기 모임)를 설립하였다. 이어 1936년에 상급학교 진학을 337
돕고자 농업실습학교(農業實習學校)를 설립하였으며, 졸업생들이 영농지도사로 취업을 원할 경우 관 구비전승
청에 취직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43년 삼미 1, 2 저수지(貯水池)를 만들어 수리안전답(水利安全畓)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 민속
해방이후 수원군 오산면 초대면장이 되었고, 1951년부터 오산학원 이사로 활동하며 오산중·고등 · 경기도당굿과
학교 설립과 발전에 앞장섰다. 1957년 독산성 세마대(洗馬臺) 복원을 위한 독산성고적중건위원회 위
원으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삼미의숙을 세웠을 뿐만이 아니라 자작농계, 흥농계, 저수사업, 조림사업
등을 통하여 농촌진흥에 매진하였다.
경기재인청
선생은 수원군 성호면의 대지주로서 삼미공영회란 조직을 통해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
년 삼미의숙유지회를 시작으로 1925년 삼미윤씨식산조합, 1927년 무산인공동경작조합, 같은 해에
삼미저곡조합을 만들었으며 1929년 화남흥산조합, 1930년 삼미신종조합, 1932년 삼미공동경영조합, / 성씨
1933년 방곡진흥회 등 16개 조직을 창설하여 삼미공영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 인물
그 결과 농업생산량이 증대되었고, 지역 소작농민들이 자작농계를 통해 자작농으로 자립할 수 있
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또한 해방 이후 해평윤씨 종중에서 설립한 삼미의숙을 국가에 헌납하고 오산
중·고등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오산교육발전에 헌신하였다.
선생은 1966년 10월 15일 69세를 일기로 운명하였으며, 오산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67년 4월 29일 추모비를 세웠다.
참고문헌
오산중학교50년사, 오산학연구 5, 오산시사 2009.
39. 윤훤(尹萱)
1444년(세종 26) ~ 1504년(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자는 백영(伯英)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참지의정부사
를 지낸 사수(思修)이고, 할아버지는 통정대부로 수원도호부사(水原都護府使)를 지낸 처성(處誠)이
며, 아버지는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된 면(沔)이다.
공은 효우(孝友)가 하늘에 닿았고 학문에 힘써 경사(經史)에 밝았으나,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자 조
정에서 그의 재주를 애석하게 여겨 천거(薦擧 : 후보자를 3년마다 3인씩 추천케 하는 임용 제도, 천거
는 과거(科擧) 제도의 단점을 보완하고 유능한 인재를 널리 구하기 위해 실시됨)로 익위사 사어를 제
수하였다. 그 후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로 옮겨지고 다시 조봉대부 사섬시첨정으로 승진하였다. 관
직에 나아가서는 화폐의 출납을 상세히 살펴 작은 착오도 없었다. 다시 군기시첨정으로 전임되었다
가 1504년(연산군 10)에 병을 얻어 사망하니 향년 61세였다.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외삼미동 해평윤씨 선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