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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유엔군초전기념비 길 건너편에 구 유엔군초전기념비(일명 스미스전투부대기념비)가 있다. 335
1955년에 미군 제24사단 장병들이 건립했고, 1964년 미제24보병사단 장병 일동, 미제24보병사단 동 구비전승
지회, 미8군장병일동, 미육군동지회한국지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유엔군자
유수호참전기념비건립위원회, 현대건설주식회사, 유희훈, 백승근의 협력으로 보수해 지금에 전하고 · 민속
있다. · 경기도당굿과
유엔군초전기념비는 6·25전쟁에서 유엔군과 북한군의 최초 교전이 오산시 죽미령에서 발발했고,
이때 전사한 유엔군소속 미군 제24사단 스미스부대원을 기리기 위한 전적물이다. 탱크를 앞세우고
남하하는 북한군에 소총으로 맞선 스미스부대는 540명의 부대원 중 150명이 사망하고, 31명이 실종
경기재인청
하는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 전투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북한의 침공을 가볍게
여기던 미국을 당황케 하여 이후 주력부대가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1955년 미군 제24사단 장병에 의해 초전지의 기념비 제막식 및 추도식이 거행되어 이듬해까지 이 / 성씨
어지다가, 미군 24사단이 유럽으로 전속되어 초전기념비에 대한 관리 주체가 없어진 상황에서 선생 · 인물
이 1957년 7월 5일에 추도식을 주관하였다. 그해 7월 19일에 유엔군참전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이사
장에 선임되어 유엔군초전기념식 및 스미스부대추도식을 주관하게 되었다. 이후 유엔군참전기념 단
축마라톤대회를 개최했고, 유엔군참전노래를 제정, 발표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으나 관리 재단 없이
시설보수와 행사 존속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1964년 유엔군사령관에 통보하여 미8군 민사처장 주관
으로 시설을 일신하고 추도식을 치렀다. 1965년에는 미8군 민사처장이 본국으로 전속되어 선생이 개
인 자격으로 추도식으로 거행했고, 이해에 화성문화원이 창립되고, 선생이 초대 화성문화원장이 되
면서 자연스럽게 1966년부터는 화성문화원 주관으로 추도식이 이루어졌다.
선생은 유엔군참전원호국에 도의적인 감사를 다하고, 이 기념사업을 시행함으로써 국제친선을 도
모한다는 취지로 기념식 및 추도식을 진행했다. 그리고 선생은 농촌협진회 추진인 대표도 역임했는
데, 이에 대한 자료가 너무 미약해 활동을 알기 쉽지 않은 실정이다.
1965년 화성문화원의 초대 문화원장으로서 선생은 척박한 지역문화 창달에 매진하여 영화순회 상
영, 도서관 설치, 각종 전시사업, 문화강좌, 웅변대회, 백일장, 화성예술제, 고적 보전 등의 사업을 계
획하고 실천했다. 1950년대 6·25전쟁 이후부터 60년대까지 선생은 오산의 문화유산을 보전하고 전
통을 계승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선생은 마지막으로 독산성과 황구지천 사이에 학교를 유치
하려고 추진했으나, 이는 끝내 빛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참고문헌
세마대중건기, 세마대중건경위서, 舊유엔초전기념비 비문, 독산성세마대·유엔군초전기념비·농촌협진회-사진
첩, 화성문화원 50년사, 유완재 구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