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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본받아 노론 정권하의 고려사에 대한 역사관을 대
                  변해 주는 강목체(綱目體)의 『여사제강(麗史提綱)』을 편찬하였다. 천문, 지리, 의약, 복서(卜筮), 음양

                  (陰陽), 이수(理數), 역학(易學) 등 다방면에 정통하였다. 임천의 칠산서원(七山書院), 무안의 송림서
                  원(松林書院),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남집』, 『가례원류』, 『여사제

                  강』, 『강거문답』 등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송시열과 친분이 두터워
                  공의 비명(碑銘)은 우암(尤菴)이 지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市南集, 國朝人物考, 典攷文獻.




                  29. 유상지(兪尙智)


                  1380년(고려 우왕 6) ~ 1432년(조선 세종 14)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아버지는 귀생(貴生)이고, 할아버지는 홍(弘)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경(冏)
                  이다. 강유신(姜有信)의 사위이다. 오산을 비롯한 수원·화성 일대에 창원 유씨가 연고를 갖게 된 것

                  은 유상지 때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화성시 정남면 내리 사동(寺洞:일명 절골)에 그의 어머니인
                  신천강씨(信川康氏) 묘소가 있고, 본인 역시 죽은 후 그곳에 묻힌 것으로 보아 그런 추정이 가능하다.

                  태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집현전 직제학, 승정원 좌승지, 좌부대언 등을 역임하였다. 자질이 단
                  정하고 곧은 도량(度量)으로서, 학문은 경적(經籍)을 연구하고 지식은 고금의 마땅한 것을 통달하였

                  다. 사후에 세종이 직접 좌부대언 유상지(兪尙智)가 죽으니, 미두(米豆) 30석, 종이 1백 권, 관곽(棺
                  槨) 및 석회(石灰) 40석을 내려 주었다.
                    묘소는 화성시 정남면 내리 사동(절골)에 있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창원 유씨 족보.




                  30. 유수(兪遂)
      오산시사
                  1415년(태종 15) ~ ?

                    오산시 서동 출생으로 호는 월산(月山)이고 세종조에 집현전 직제학과 좌부대언을 지낸 유상지(兪
      제

      6           尙智)의 아들이다. 1453년(단종 1)에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공조정랑(工曹正郞)이 되었다. 인품이 온
      권
                  후하고 지조가 있으며 학문에 힘써 세상을 보는 안목이 남달랐다고 하며, 특히 성균관에 있을 때는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인 유성원(柳誠源)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1455년(세조 1) 단종 폐위 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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