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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우성전(禹性傳)
1542년(중종 37) ~ 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서예가·의병장으로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
(秋淵)·연암(淵庵)이며, 환(桓)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郞) 성윤(成允)이고, 아버지는 현
령 언겸(彦謙)이며, 대사헌 허엽(許謙)의 사위이다. 일찍이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생으로 『퇴계집』에
는 퇴계선생이 그에게 보낸 편지글이 다수 실려 있다.
1561년(명종 16) 진사가 되고, 1564년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요승 보우(普雨)의 주살을 청원하기
도 하였다. 1568년(선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봉교(奉敎), 수찬(修撰) 등을 거
쳐 1576년(선조 9) 수원현감으로 나가서는 명망이 높았다.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장령(掌令)·사옹
원정을 거쳐 1583년(선조 16)에 응교(應敎)가 되고 뒤에 여러 번 사인(舍人)을 지냈다. 동서분당 때 동
인으로 분류되었고, 그 뒤 이발(李潑)과 틈이 생기자 그는 남산에 살아서 남인, 이발은 북악(北岳)에
살아서 북인으로 분당되었다. 남인의 거두로 앞장을 섰으며, 동서분당 때나 남북의 파쟁에 말려 미움
도 사고 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홍문관 응교·의정부 사인 등을 지내고 있던 1591년(선조 24) 서인인
정철(鄭澈)의 사건에 연좌되어 북인에게 배척되고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와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집해 군호(軍號)를 ‘추의군(秋義軍)’이
라 하고 소금과 식량을 조달해 난민을 구제하였다. 또한 강화도에 들어가서 김천일(金千鎰)과 합세해
전공을 세우고 강화도를 장악해 남북으로 통하게 하였다. 병선을 이끌어 적의 진격로를 차단했으며,
권율(權慄)이 오산 독성산성(禿城山城)에서 행주에 이르자 의병을 이끌고 지원하였다. 그 공으로 봉
상시정에서 대사성으로 서용되었다. 그 뒤 계속 의병장으로 활약, 용산의 왜적을 쳐서 양곡을 확보해
관군과 의군의 식량을 마련하였다. 그 뒤 퇴각하는 왜군을 경상우도 의령까지 쫓아갔으나 과로로 병
을 얻어 경기도 부평에서 사망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계갑일록(癸甲日錄)』·『역설(易說)』·『이기설(理氣說)』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서예가로서도 이름을 떨친 공의 필적으로는 조선 시대 서간형식의 변천을 잘
반영하고 있는 『선현유묵(先賢遺墨)』에 실린 「간찰」과, 오세창이 엮은 선현묵적 『근묵』 중 상(喪)을 당
한 것을 위로하는 편지에 답장을 한 「위장답(慰狀答)」이 남아있다. 또한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정유재
란 당시 의병으로 큰 활약을 폈던 10인의 편지와 시를 모은 서첩인 『해동명필(海東名筆)』에도 정곤수
(鄭崑壽) ·김응남(金應南) 등과 함께 필적이 실려 있다. 그리고 『계갑일록(癸甲日錄)』은 경기도유형
문화재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산시사
참고문헌
제
6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東儒師友錄, 星湖先生文集, 黨議通略.
권
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