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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金千鎰)과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은 성을 비우고 내륙 지대에서 적과 맞                                       323
                  설 것을 주장한 선거이의 뜻에 따르지 않고 농성을 결의하여 10만에 이르는 왜군에 맞서다가 전멸하                                          구비전승

                  였다. 이 일로 선거이는 군율(軍律)을 어기고 진주성의 군민(軍民)을 달려와 구원하지 않았다는 죄로
                  사헌부와 비변사의 탄핵을 받았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에도 김천일의 충절이 높이 평가될 수록 선                                           · 민속

                  거이는 반대파의 비판을 받아 군공(軍功)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                                                           · 경기도당굿과
                    한산도에 내려와서는 이순신을 도와 둔전(屯田)을 일으켜 많은 군곡(軍穀)을 비축하는 공을 세웠으

                  며, 1594년 9월에는 이순신과 함께 장문포(長門浦) 해전에서 또 공을 세웠다. 그 뒤 충청수사가 되고
                  다음 해 황해병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남해·상주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598년에는
                                                                                                                    경기재인청
                  울산전투에 참가,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를 도와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순신과 절친한 사이로 전투
                  에서도 서로 도와 이름이 높았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추봉되고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                                                                             /  성씨



                  참고문헌                                                                                            · 인물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백사집(白沙
                  集),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오산학연구 5집.





                  21. 신영(申榮)


                  1816(순조 16) ~ 1891(고종 28)

                                                                   조선시대 세종(世宗)때 좌의정을 지낸 문
                                                                 희공(文僖公) 개(槩)의 후손으로 부친은 호
                                                                 조참판으로 증직된 의방(義防)이다. 공의 행

                                                                 적이 알려지지 않고 있었으나, 효심이 지극

                                                                 하여 효자정문(孝子旌文)을 내려받아 효자
                                                                 문이 오산시 금암동에 있었다. 그러나 후손
                                                                 들과 지역주민들의 무지와 무관심으로 효자

                                                                 문은 사라져버렸으나, 금암향우회에서 발간

                                 신영효자문 현판                        한 『2013 내고향 금암동』에 효자문 사진이 발
                                                                 견되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효자문 현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孝子贈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申榮之門>
                    공이 사후에 자헌대부 호조판서로 증직되었다는 내용이다. 앞으로 공의 효행이 밝혀져 널리 알려

                  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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