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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평산신씨 족보, 2013 내 고향 금암동.
22. 심민겸(沈敏謙)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의병장으로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자는 사윤(士允), 호는 두암(杜菴)이고, 선(璿)의 5대
손이며, 증조가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 사람인 풍(豊)이다. 일찍부터 학문에 힘썼으나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고, 부모를 섬김에 지극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군량조달에 힘썼다. 특히 오산 독산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정유
재란 때에도 다시 왜군을 격퇴하는 데에 공을 세워 전란이 끝나자 주부(主簿)에 제수되었다. 1624년
(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근왕병을 모집하여 인조를 호종하였고, 정묘호란 때에는 동궁
(東宮 : 태자)을 호종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군량을 모아 강화도에 공급하였다. 전라도 옥과의 구암
사(龜巖祠), 나주의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仁祖實錄, 湖南三綱錄, 韓國系行譜.
23. 심성희(沈聖希)
1684년(숙종 10) ~ 1747년(영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자는 이천(而天)이며, 참의 유(攸)의 증손으로, 할아
버지는 한주(漢柱)이고, 아버지는 능주목사 봉휘(鳳輝)이며, 어머니는 홍주국(洪柱國)의 딸이다. 문신
으로 삼사의 요직과 이조판서·대사헌을 지냈으며, 노론으로서 소론에 맞서 여러 차례 강력한 언론
활동을 펼쳤다. 약관(弱冠)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장의(掌議)가 되었다. 1715년(숙종 41) 유
계(兪棨)의 『가례원류(家禮源流)』 간행 때 윤증(尹拯)이 스승인 유계를 배반했다 하여 심히 배척하였
고, 이어 이진유(李眞儒)가 윤증을 비난한 정호(鄭澔)의 발문을 불사르게 하자, 그는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이를 항소하고 권당(捲堂 : 성균관 유생들이 불평이 있을 때 이를 관철하기 위하여 관을 비움)까
오산시사
지 하였으나 소론의 득세로 축출되었다. 얼마 뒤 노론의 복귀로 익릉참봉(翼陵參奉)에 등용되었고,
1725년(영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注書)가 되었다가 설서(設書)로 옮겼다. 그 뒤 부수찬
제
6 (副修撰)을 거치는 등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고 대사간 및 충청·경상도의 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
권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단아하고 재식이 뛰어났다고 하며, 삼사에 재직할 때는 직언을 잘하고 외직에 나가서는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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