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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용진과 여주 파사성(婆娑城)을 수비하였다. 광해군
                  때에 훈련대장과 판윤에까지 승진하였다. 1602년(선조 35) 독산성을 석성으로 수축하였고, 1612년

                  (광해군 4) 박응서(朴應犀)의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
                  며, 시호는 양혜(襄惠)이다.

                    공이 경기방어사로 재직할 때 세운 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변응성선정비가 있다. 높이 143cm,
                  폭 62cm, 두께 22cm 규모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앞면에 ‘방어사 변응성 선정비(防禦使邊應

                  星善政碑)’라고 새겨져 있으나 건립연대에 대한 기록은 적혀 있지 않다. 원래 경기도 오산시 독산성
                  (禿山城, 사적 제140호) 밖 서쪽 주차장 근처에 있었다고 하며, 독산성 보수공사를 할 때 현 위치(경

                  기도 오산시 지곶동 242번지)로 옮겨졌다고 한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청선고(淸選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오산시사 2009.





                  17. 변이중(邊以中)


                  1546년(명종 1)  ~ 1611년(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황주(黃州)이고, 자는 언시(彦時), 호는 망암(望庵)이며 전라

                  도 장성출신이다. 택(澤)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함풍 이씨(咸豐李氏)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7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전라도 소모어사가 되어 군비 수습에 힘썼다. 오산 독산성에 주둔하며 왜군에 맞섰다. 이곳에
                  서 화차(火車) 300량을 제조하여 순찰사 권율(權慄)에게 주어, 행주대첩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화차

                  는 공이 문종화차를 개량하여 만든 것으로, 수레 위에 40개의 승자총통을 총통기에 설치하고 총통의
                  심지를 이어서 차례로 쏘게 한 것이다. 그 뒤 조도사가 되어 누차 전공을 세웠다.

                    1603년 함안군수를 지내다가 1605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장성에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이이와
                  성혼의 학통을 이어받아 성리학과 경학에 밝았으며, 군사전략에도 밝아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웠다. 특히 그의 논문인 「총통화전도설 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 火車圖說」에 의거하여 화

                  차를 제조한 공로는 우리나라 과학사에 있어서 커다란 업적이었다. 뒤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장성 봉암서원(鳳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망암집(望庵集)』이 있다.
      오산시사

                  참고문헌

      제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月沙集, 오산시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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