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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박영효(朴泳孝)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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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1년(철종 12) ~ 1939년
                    조선 말기의 정치가이자 급진개화파였으며, 친일부역자이다. 화성시 진안동(당시는 수원군 태장

                  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초명은 무량(無量),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락(春樂), 춘                                    · 민속
                  고(春皐), 현현거사(玄玄居士)이다.                                                                            · 경기도당굿과

                    그의 부친은 박원양(朴元陽)이며, 1872년 12세 때 박규수(朴珪壽)의 천거로 철종의 딸 영혜옹
                  주(永惠翁主)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고 금릉위(錦陵尉)의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영혜옹주가 결

                  혼 석 달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1879년 혜민서 제조, 1881년 의금부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경기재인청
                  박규수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접하게 되었으며, 유대치(劉大致)와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

                  植)·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 인물들과 교류하며 급진개화파의 일군이 되었다. 1882년(고종 19) 임                                       /  성씨
                  오군란(壬午軍亂)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파견되는 수신사 대표에 임명되어 민영익·김옥균 등과

                  일본을 시찰했다. 일본에 머물면서 박영효는 대사로서의 공식 업무 외에 일본의 근대화시설을 돌아                                            · 인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개국 후 단시간에 군대, 재무, 산업 분야에서 근대화를 이루어낸 일본에

                  큰 감명을 받았고 이들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돌아와 도로를 관
                  장하는 치도국(治道局), 경찰업무를 담당하는 경순국(警巡局), 신문발행을 담당하는 박문국(博文局)

                  등을 설치하며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힘을 얻은 민씨 척족 세력인 민태호, 안동김씨 세력이던 김병시,

                  김병국 등이 중심이 된 수구파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어 박영효의 개혁 시도는 이들에 의해 번번이
                  좌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저녁, 박영효를 비롯한 급진개화파들은

                  우정국 축하연 자리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민씨 척족세력을 살해하고 일본군과 조선군을 동
                  원하여 고종과 왕비를 경우궁(景祐宮)에 유폐한 후 정권을 획득하였다. 이것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급진개화파는 정권을 잡았고 박영효는 친군전후영사겸좌포장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
                  했으나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은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났다. 박영효는 이 일로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고, 1885년 서재필, 서광범과 함께 도미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야마자키(山崎永春)로 개명하고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입학, 영어를 배우고, 유학생들의 기숙사 친

                  린의숙(親隣義塾)을 경영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어 귀국,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에
                  서 내무대신으로 입각했다.

                    박영효는 내무대신으로 있으면서 을미개혁을 단행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개혁을 추진하지만, 1895
                  년 명성황후 암살음모를 꾸민다는 누명을 쓰고 재차 일본에 망명했다. 1898년 중추원 회의에서 그를

                  정부요직에 다시 기용하자는 건의가 나왔고 이런 움직임을 반대파에서는 박영효 대통령설을 유포시
                  켜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 데 이용하였다.

                    일본 망명 12년 만인 1907년, 박영효는 을사오적 중 하나인 박제순의 주선으로 다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그는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으로 임명되어 일했는데, 당시 그는 한때 자신이 왕좌에서

                  끌어내리려 했던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억지 양위를 할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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