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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과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기념비이다. 수촌리 입구에 세워 311
진 기념비의 높이는 4m, 부지 면적은 50㎡이다. 1974년 3월 1일에 제막하였으며, 2003년 1월 국가보 구비전승
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참고문헌 · 민속 · 경기도당굿과
공훈록공적조서(공적개요독립유공자 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오산시사 2009.
경기재인청
8. 김용준(金用俊)
1881년 ~ ? / 성씨
오산시 금암동(옛 수원군 성호면 금암리)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9일 당시 수원
군 성호면(城湖面) 오산장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물이다. · 인물
오산의 만세 운동은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김경도(金敬道), 유진홍(兪鎭弘),
이성구(李成九), 정규환(鄭奎煥), 이규선(李圭璇)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는데, 이들이 동지를 포섭하는
과정에서 선생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한편 거사 일을 오산의 장날인 3월 29일(당시 음력 2월 28
일, 오산의 장날은 실제 음력 3일과 8일이었다)로 정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 제작하는 등
의 준비를 진행시켰다.
거사 일에 이르러 김용준 등은 오산장에 모인 3백여 명의 군중들에게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배포
하면서 독립만세를 목소리 높이 외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시위 도중에 유진홍과 안낙
순 등 6~7명이 일경에 체포되자, 시위 군중은 일시 해산했다가 다시 모여 이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주재소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는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어 선생을 비롯한 시위 군중들은 시위를 해
산시키려는 당시 성호면장 유종렬(劉鍾烈)에 대항하여 면장을 죽이겠노라고 위협하는 한편 면사무소
를 점령하고 만세시위를 밤늦게까지 전개하였다. 시위 군중들의 위세에 눌린 경찰은 시위 군중이 해
산하는 것을 조건으로 그들을 석방하였다. 이에 고무된 군중들은 환호하면서 여러 번 만세를 불렀다.
이때 인원은 약 7~8백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시위 군중들은 돌을 던져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다시
우편소로 몰려가 군대와의 통신을 방해할 목적으로 전화기를 부수었다. 그리고 근처의 일본인 상점
들에 돌을 던지거나 건물을 부수었으며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오산역으로 몰려가 역사(驛舍)를 습격
하였다. 이어서 일본인 가옥 11채를 파괴하였다. 이때 일경이 수비대, 소방대의 응원을 받아 닥치는
대로 총칼로 위협하자 할 수 없이 해산하였다. 선생은 궐석재판으로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
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騷擾) 혐의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5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