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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은휘(金殷輝)
1541년(중종 36)∼1611(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자는 경회(景晦), 할아버지는 군수 종윤(宗胤)이고,
아버지는 증찬성 호(鎬)이며, 어머니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다. 큰아버지인 석(錫)에게 입양되었다.
성리학의 대가이며 천명(天命)과 인성(人性)의 관계를 도식화하고 해설을 붙인 <천명도설天命圖說>
의 저자 정지운의 제자이다.
여러 차례 과거에 실패하고 음보로 벼슬길에 나가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사포서별제(司圃署別
提)·수운판관(水運判官)·통례원인의(通禮院引義)·감찰·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호조좌랑·공
조좌랑·형조정랑·호조정랑·종친부전적(宗親府典籍)·통례원상례(通禮院尙禮)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교하현감·임피현령 및 청도·단양 등 여러 고을의 군수를 거쳐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으며, 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였다. 이듬해 관병과 의병의 연합군을 이끌고 오산의 독성산성(禿城山城)을 지키
며 왜군과 싸웠다. 그런 와중에 정철이 무고를 당하여 파직되자 낙향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호패법
(號牌法)을 시행하려 하자 그 불편한 점을 상소하였고, 정여립(鄭汝立)을 여러 차례 규탄하였다. 재질
이 민첩하고 지략이 뛰어났다고 하며, 만년에 수직(壽職 : 나이가 많은 자에게 주는 대우직)으로 가선
대부에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谿谷集.
10. 김천일(金千鎰)
1537년(중종 32) ∼ 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이다. 본관은 언양(彦陽)이고 자는 사중(士重)이며 호는 건재(健齋),
극념당(克念堂)이다. 나주 출신이다. 증조부는 연산군 때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여러 번의 부름
에도 끝내 응하지 않았던 목사공(牧使公) 순형(順炯)이고, 조부는 주부 윤손(潤孫)이며, 부친은 진사
오산시사 언침(彦琛)이고, 어머니는 양성 이씨(陽城李氏)로 부위(副尉) 감(瑊)의 딸이다. 2차 진주성 전투 중에
순절한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삼장사(三壯士)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일찍이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성리학에 밝았으며, 김인후(金麟厚), 유희춘(柳希
제
6 春) 등과 교유하였다.
권
1573년(선조 6) 그의 학행이 알려지자 유일(遺逸 : 조선시대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하
는 인재 등용책.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로서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으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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