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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고(獄苦)를 치렀으며, 투옥(投獄)하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  찰·예조좌랑·호조정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을 지냈다.                        307
 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騷擾) 혐의로 태형(笞刑) 90대를 받았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항일운동을   1591년에 재차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바로 의주목사로 발탁되                    구비전승

 전개하였으며, 일본경찰과 일본인 폭행 등으로 체포 및 석방을 반복하면서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어   었으나, 이듬해 해직되었다.
 갖은 고초를 겪다가 인천(仁川)으로 피신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어 바로 임                             · 민속

 이후 일제에 당한 잔혹한 고문의 여독(餘毒)으로 간절히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지켜보지 못한 채,   지로 떠났다. 왜병에 의해 수도가 함락된 뒤 전라도관찰사                          · 경기도당굿과
 1939년 10월 27일 고향땅인 오산(烏山)을 등지고 인천 용현동(仁川 龍現洞)에서 순국(殉國)하였다.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8월 15일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서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서
                                                    울의 수복을 위해 함께 북진했다. 이광이 수원과 용인 경내
                                                                                                                    경기재인청
 참고문헌                                               에 이르러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적들을 공격하려 하자 극
                                                    력 반대하면서 자중책을 말하기도 했다. 즉, 서울이 멀지 않
 판결문(1919. 11. 06. 경성지방법원), 3·1운동실록(이용락) 375·37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343∼
                                                    고 대적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적은 적과의 싸움에서 도내                               /  성씨
 348면, 독립유공자공훈록, 두산백과사전 한국사회 인물편(네이버 참조), 오산아래뜰공원 3.1독립항쟁의사 추모비,
 1959년 발간 곡부공씨 파보 4권 29면, 1996년 발간 곡부공씨 세보 2권 62~63면, 화성시사(화성시사편찬위원회).  의 병력을 모두 소모할 것이 아니라,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        · 인물
                  강을 막아서 서로(西路)를 튼튼히 하여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를 보장한 다음에 적의 틈을 살
                  피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장인 이광이 듣지 않고 무모한 공격

 4. 공희(孔禧)        을 취해 대패하고 선봉장 이시지(李詩之)·백광언(白光彦) 등 여러 장수들이 전사했다. 오직 혼자만
                  이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퇴각해 후사를 계획했다.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한편, 남원에서 1,000여 명의 의군을 모집해 다시 북진, 금산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
 오늘날 오산에 곡부(曲阜) 공씨가 처음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바로 공희로부터이다. 공희는 현재
                  (小早川隆景)의 정예 부대를 맞아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싸웠다. 이
 의 오산시 궐동(옛 수원부 중규면 구정촌, 혹은 수원군 초평면 구정촌)의 궐리사 부근에 터를 잡고 살
                  싸움에서 황진이 총을 맞아 사기가 저하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군사들을 독려해 왜병을 격퇴시켰다.
 았다고 한다. 공자의 60세손으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의 벼슬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追
                  이치전투의 승리는 이순신의 해전과 함께 곡창지대인 호남을 보호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贈)되었다. 공서린의 고조부이며, 묘는 오산 인근의 화성시 동탄면 만의산 동쪽 무봉산(舞鳳山)에 있다.
                  해 가을 이치싸움의 공으로 곧 전라감사에 승진하였다.
                    12월 도성 수복을 위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 길에 올라 직산에 이르러 잠시 머물다가,
 참고문헌
                  북상하라는 행재소의 전갈을 받고 북진하여 오산 독성산성(禿城山城)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 대
 공씨 족보, 오산시사 1999.
                  병이 그곳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왜병의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후방의 연
                  락이 단절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도성에 주둔한 왜병을 풀어 삼진(三陣)을 만들고 오산 등 여러 곳에
                  진을 친 다음 서로 오가게 하며 독성산성의 아군을 밖으로 유인하려 했다. 그러나 성책을 굳게 해 지
 5. 권율(權慄)
                  구전(持久戰)과 유격전을 펴가면서 그들에게 타격을 가하자 몇 날이 지난 다음 영책(營柵)을 불사르
 1537년(중종 32년) ~ 1599년(선조 32년)  고 도성으로 물러났다. 적이 퇴각할 때 정예 기병 1,000명을 풀어 적의 퇴로를 기습해 많은 왜병을 베
 조선시대 명장으로 장군의 행주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었는데 이곳이 지금의 화성시 봉담읍 삼천병마곡이다.

 3대첩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이다. 도첨의   장군이 오산 독산성에 주둔하여 왜적과 대치하게 되었을때, 성중에 물이 부족하여 밥을 짓는데 어

 (都僉議) 보(溥)의 9세 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겸 강화진관 병마첨절제사 적(勣)이고, 아버지는   려움이 있었다. 왜군이 와서 보니 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보내
 영의정 철(轍)이다.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고, 영의정까지 역임한 이항  며 조롱하였다. 권율은 물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말 서너 마리를 산 위로 끌어 올리고서 목욕시
 복(李恒福)의 장인이 된다.  키는 것처럼 흰 쌀을 끼얹었다. 이를 본 왜군은 말을 씻길 만큼 산꼭대기에 물이 풍부하다고 생각하

 1582년(선조 15) 45세의 나이에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  고는 물러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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