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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로 갔으며, 만주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교편생활을 하다가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타계했다                                         305
                  고 한다.                                                                                           구비전승



                  참고문헌                                                                                            · 민속


                  京畿道鄕土史敎育資料誌(Ⅰ) 「역사편」 경기도교육위원회, 1974.                                                            · 경기도당굿과
                  京畿道史(권 1), 1967, 水原郡邑誌, 東亞日報, 中外日報, 時代日報.
                  오산중학교50년사.


                                                                                                                    경기재인청

                  3. 공칠보(孔七甫)


                  1883년 5월 27일 ~ 1939년 10월 27일                                                                     /  성씨
                    오산시 궐동(옛 수원부 중규면 구정촌, 혹은 수원군 초평면 궐리, 또는 수원군 성호면 궐리) 159번                                      · 인물

                  지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곡부(曲阜), 본명은 공석윤(孔錫允)이다. 자(字) 칠보(七甫)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경기도 오산(烏山)사람으로 1884년(고종 21)에 태어났다.

                    공칠보(孔七甫)는 1901년 9월 이후부터 시작된 경부선(京釜線) 철도 부설 현장에 끌려가 강제노
                  역에 동원되었으며, 사유재산 및 토지 등 모두를 약탈당하면서 일본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커져갔다.

                  1904년 6월 공칠보(孔七甫)는 김기우(金箕祐) 등 32명과 함께 제1차 배일통문(排日通文)을 발기 작성
                  하여 철도 부설에서 일어난 일본의 작폐를 비롯하여 국권의 침탈과 이권의 착취, 그리고 북진하는 일

                  본군의 야욕 등을 지적하여 총궐기를 부르짖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19년 3월 1일에 벌어진 독립만세운동 이후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공칠보(孔七甫)는

                  수원군(水原郡) 성호면(城湖面)(현 오산시)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유진홍(兪鎭弘), 이성구
                  (李成九), 이규선(李圭璇), 김경도(金敬道), 정규환(鄭奎煥), 김용준(金用準), 안낙순(安樂淳) 등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거사 일을 오산장날인 3월 29일(당시 음력 2월
                  28일)로 정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는 등 준비를 진행시켜 갔다. 거사 일에 이르러 공칠

                  보(孔七甫)는 오산장에 모인 300여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시위 도중에 공칠보, 안낙순, 유진홍 등이 일경에 피체되자, 시위 군중들은 이들을 구출하
                  기 위하여 주재소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는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후 오후 4시경 다시 모인 5백여

                  명의 시위군중은 공칠보 등의 석방을 요구하였고 이에 당황한 일경은 곧 구속된 사람들을 석방하였
                  으며, 석방된 공칠보는 시위군중과 함께 시위를 해산시키려는 면장 류종렬(劉鍾烈)에 대항하여 면사

                  무소를 점령하고 우체국의 전화통을 파괴하여 수원(水原)으로부터 오는 일본군의 지원을 불가능하게
                  하였으며, 인근의 일본인 주택 및 상점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밤 늦게까지 주도하였다.

                    이에 출동한 헌병대 및 일경들은 강경책으로 시위 군중을 향해 총을 발사하였고, 공칠보 외 3명이
                  중상을 입고 오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이 일로 피체되어 1년여간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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