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6 - 제6권
P. 306
으로 전해진다. 일제시대 때 사회운동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다 일제의 핍박을 피해 만주에서 교육운
동을 펼치다 생을 마감했다.
1927년 민족단일당(民族單一黨)의 성격을 갖고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될 때, 공석정은 신간회 수원
지회 결성에 참여했다. 신간회는 ‘민족유일당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
의 진영이 연대하여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이다. 발기인으로 참여한 인사는 안재홍, 이상재, 백관수,
신채호, 신석우, 유억겸, 권동진 등이다.
1928년 10월 16일 신간회 수원지회 회관에서는 수원지회 창립 1주년 기념 강연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날 강연회에서 간사 염석주의 사회로 김병호와 공석정이 각각 ‘수원지회 창립 1주년 기념에 대하여’
와 ‘인류의 진화법칙의 역사적 고찰’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으나, 이때 일제 경찰이 일반인의 방청
을 금지시킨 데다가, 특히 공석정의 강연은 임석경관으로부터 중지를 당했다. 이 기념 강연회는 일
경의 방해로 회를 끝마치지 못하고 회원들이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공석정은 1928년 5월 9
일 수원 북수리에 있는 천도교회(天道敎會)에서 오산 대성학원 중건회 회의 도중 외교원 유기현(柳基
賢), 서기 이봉의(李鳳儀) 등과 함께 붙잡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수원지부원으로 활약했다. 1929년 5월 11일 수원공
회당(현 팔달문의 남문시장 부근에 있었던 일제시대 회관. 옛 수원면사무소와 함께 있었으나 현재 터
만 남아있다)에서 수원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창립기념 문예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당시 200여 명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강연회에서는 김기진(金基鎭)의 개회사에 이어 박팔양(朴八陽)과 윤기
정(尹基鼎)의 강연, 임화(林和)의 시낭독까지 잘 진행되었으나, 폐회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던 공석정
이 등장하기 전에 모임이 중지당하였다.
공석정은 1926년 4월 24일 시대일보사 오산분국 기자를 거쳐 1930년 3월 24일에는 중외일보사 수
원지국 기자로 활동했으며, 더욱이 1930년 3월 26일에는 우영규(禹迎奎), 김병호(金炳浩), 윤택영(尹
宅榮), 박승극(朴勝極), 박선태(朴善泰) 등과 함께 수원기자동맹을 창립하여 활약하다가 수원서 고등
계에 붙잡혀 취조를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1929년 6월 28일과 29일에 걸쳐 신간회 중앙간부 선거위
원으로 수원구역에서 인천, 강화, 광주, 수원, 안성의 5개 지회가 협의하여 공석정을 대표로 선출하
였다. 이후 1930년 5월에는 수원노조 공석정과 수원청맹 박승극 두 사람이 일경에 검거되는 등 끊임
없이 고초를 겪었다.
한편 2002년 발행된 『오산중학교 50년사』에 공석정이 1927년 대성학원을 설립했다고 기록되어 있
다. 내용을 보면 “1927년 성호면 오산리(현 오산시 공설운동장 부근 르노삼성자동차대리점 자리)에
오산시사 금곡리의 유지 공석정이 설립하여 보통학교를 졸업한 청소년들을 모아 한국사, 사회, 수학, 이념사
상 등을 교육시키는 독립정신함양교육장이었다. 교사진으로는 공석정을 비롯 변기재, 이원식, 장운
봉 등 이었다. 설립된 지 2~3년 후 일제의 감시하에 위축되던 중 의문의 방화로 마침내 문을 닫고 만
제
6 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공석정은 일제치하에서 진보적인 시각으로 끊임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조국
권
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다.
공석정은 언제 만주로 갔는지는 확실한 자료가 없으나 증언에 의하면 일경의 학대와 감시를 피해
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