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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을 고민하던 중 이 지역 유지들과 힘을 모아 성호고등공민학교 설립인가를 받아냈다. 그리고 계                                          299
                  속해서 1950년 5월 오산중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이에 그는 오산학원 초대이사장을 역임하게 되었                                         구비전승

                  다. 한편, 벌음동은 오산 도시계획 세교2지구 택지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어 현재 전통 자연마을은 모
                  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신도시인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 민속 · 경기도당굿과






                  제15절    금암동 청주한씨


                                                                                                                    경기재인청
                    금암동 청주한씨(淸州韓氏) 시조는 한란(韓蘭 ?~?)으로 왕건(王建)의 고려 창업에 공(功)을 세워
                  벼슬이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그의 시호는 위양(威襄)이다. 태조가 견
                  훤(甄萱)을 정벌하려 청주 고을에 당도하자 한란이 군례(軍禮)를 갖추고 이를 맞아 창고에 비축한 곡                                          /  성씨

                  식을 풀어 10만 군사를 배불리 먹이고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금암동 청주한씨는 조선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양절공 한확(韓確 1400~1456)의 둘째 아들 장도                                      · 인물

                  공(章悼公) 한치의(韓致義 1440~1473)를 중시조로 하고 있어 청주한씨 장도공파에 속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과를 올려 선무 원종공신과 이조참판에 추증된 한명윤(韓明胤

                  1542~1593)의 후손이다. 한명윤은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에서 태어났다. 선조는 1593년 전사한명윤
                  과 순절한 부인 박행장을 가상히 여겨 충신문과 열녀문을 내렸다. 이 충열각은 명윤의 고향인 정문리

                  에 세워져 전해지고 있다. 양감면 정문리와 송산리에 세거하던 청주한씨는 한광익(韓光益)이 서문리
                  에, 한관유(韓寬裕)는 동탄면 상오산리 절곡(節谷)에 묘가 있으며, 27세 한용좌(韓用佐)에 이르러 화

                  성군 오산읍 도동(禿洞)에 나타난다. 그리고 한용좌의 아들 한명리(韓明履1801~1863)가 최초로 금암
                  동 선영(先塋)에 안장되었다. 따라서 청주한씨 금암동 입향조는 한용좌로 여겨진다. 이렇게 보면 청

                  주한씨는 약 1,800년경부터 금암동에서 살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근거가 되는 것은 금암동에 25
                  기의 묘가 있었고 금암동과 인접한 도동(독골)에 5기, 세교동에 2기의 묘가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묘(墓)로 자손들의 확산과 번창을 들여다보면 27세 1기, 28세 2기, 29세 4기, 30세 6기, 31세 10기,
                  32세 7기, 33세 2기가 있다.

                    27세부터 31세까지 묘소가 늘어나다가 32세에 30%가 줄고 33세손부터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것
                  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모하는 사회적인 변화를 반영하여 농촌에 살던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

                  했음을 보여 준다.
                    한편, 2004년 오산 세교지구 택지개발로 인해 금암동 큰 마을이 수용되었으며, 뒤이어 2006년 작

                  은 마을이 수용되면서 오랫동안 살아온 전통마을이 사라졌다. 이때 누대에 걸쳐 살아오던 일가친척
                  들도 흩어져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집성촌의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또한, 시간이 흘러 집안의

                  옛 얘기를 들려줄 어른들도 이미 돌아가신 상황이라 금암동 청주한씨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이 부족
                  하지만, 족보의 기록으로 대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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