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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절   세교동 남양홍씨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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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교동 남양홍씨(南陽洪氏)는 당성계(唐洪系) 남양홍씨로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과 태사(太

                  師)를 역임한 홍은설(洪殷悅)을 1세 조로 삼고 본관을 남양(唐城)으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후                                      · 민속
                  6세손 홍관(洪灌 ?~1126)이 고려 인종 때 상서좌복야, 10세손 홍경(洪經)이 병부상서에 이르렀으며,                                     · 경기도당굿과

                  조선 개국공신으로 남양부원군에 오른 홍길민(洪吉旼 1353~1407), 예종 때 영의정에 오른 홍윤성(洪
                  允成 1425∼1475) 등이 문중 중흥에 기초가 되었다. 오산 세교동은 예부터 남양홍씨의 집성촌으로

                  홍촌(洪村말)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것이 홍씨 집성촌에 붙여진 마을 이름이라 한다. 남양홍씨가
                                                                                                                    경기재인청
                  세교동에 입향한 시기와 입향조가 누구인지 참고자료가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한편, 독

                  산성 기슭에 숙종 28년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홍수주(洪受疇 1642~1702)의 묘가 있는데 세교동 남양
                  홍씨 문중의 인물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기록(肅宗實錄, 南陽洪譜)에 의하면 홍수주는 숙종 때                                           /  성씨

                  의 문신으로 그림을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숙종 8년(1682)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과 장영으로                                       · 인물
                  재직 중 파직되어 유배를 가기도 하였으나 복직하여 충청, 경기 관찰사와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홍

                  수주의 묘는 원래 안산에 있었으나 1979년 후손에 의해 독산성 기슭에 이장되었다. 남양홍씨가 세교
                  동에 집성촌을 이뤄 살게 된 기록은 1957년 『경기도지』에 오산면 집성촌을 조사한 것에 의하면 세거

                  가구 수가 28호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교동도 택지개발로 인해 대부분 자연마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제12절    양산동 남평문씨



                    양산동 남평문씨(南平文氏) 시조는 신라 자비왕(慈悲王) 때 남평백(南平伯)에 봉록 된 문다성(文多

                  省)을 시조로 삼고 있다. 그러나 문다성의 아들 문탁(文倬) 이후의 세계(世系)가 불분명하였는데 1731
                  년 장흥 월천서원에서 발간한 남평문씨 최초 족보인 신해보(辛亥譜)가 발견되어 이를 근거로 문익(文

                  翼)을 1세조로 하고 있다. 이후 최초 합의된 대동보에서도 중시조인 문익을 1세로 하여 세계(世系)를
                  정리해 최신의 대동보(大同譜)도 이를 따르고 있다.

                    중시조 문익(文翼)은 고려 숙종 3년(1098) 좌찬선대부·급사중으로 임명되었으며, 1099년 요(遼)나
                  라에 가서 원자(元子)의 책명(冊命)을 받아와 직문하성(直門下省)으로 승진되었다. 1102년 서북면병

                  마사(西北面兵馬使)를 역임하였고, 1103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냈다. 시호(諡號)는 경절(敬
                  節)이다.

                    문익의 아들인 문공인(文公仁)과 문공유(文公裕)가 문과에 급제하여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
                  와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고, 손자 문극겸(文克謙)은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에 이르

                  렀다.
                    남평문씨가 오산에 세거하게 된 시기와 입향조가 누구인지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으나 1957년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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