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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인물
한민규│오산학연구소 연구위원
1. 공서린(孔瑞麟)
1483년(성종 14) ~ 1541년(중종 36)
조선 중종(中宗)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원(昌原)이었으
나 정조대왕의 명에 의하여 곡부(曲阜)로 개관하였고, 공자
의 64세 손(孫)이다. 오산시 궐동(옛 수원부 중규면[中逵面]
구정촌[九井村])에서 성종 14년(1483) 9월 2일 태어나 성장하
고 중종 36년(1541) 59세로 타계하였다. 자는 희성(希聖), 응
성(應聖)이며 호는 휴암(休巖)이다.
공은 일찍이 성리학의 대가인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사림파의 영수(領袖)인 정암 조광조(趙光祖), 권
발(權撥), 김안국(金安國) 등과 친교가 깊었다. 1507년(중종
2)에 생원이 되었고, 그해 진사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
과(甲科)로 급제하였으며, 1509년(중종 4) 좌랑으로 정전예
연(正殿禮宴)으로 여악(女樂)을 쓰지 말 것을 건의하였고, 사
전체제(祀典體制)를 정비할 때 강경서(姜景敍), 김안국 등과
더불어 기신재(忌晨齋) 혁파에 노력하였다.
1511년(중종 6) 사간원 정언을 거쳐 1512년(중종 7) 홍문관 부수찬, 수찬,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
오산시사
다. 1516년(중종 11)에는 사헌부 장령으로 경연에 참석하여 노산군(魯山君 : 단종)과 연산군(燕山君)
의 입후문제(入後問題)를 제기하였고, 1517년(중종 12) 시강관(侍講官)으로 경연에 참석하여 언로(言
제 路)의 확장을 주장하였다. 1518년(중종 13)에 사간원 대사간, 이조참의를 거쳐 『성리대전』 편찬의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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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독 능력이 있는 인물로 선발되었으나, 승정원 부승지로 대간을 논박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물
러났다. 1519년(중종 14) 좌승지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 등의 사림파 인
302 물들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