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5 - 제6권
P. 305
1524년(중종 19) 남곤(南袞)의 주청으로 공조참의가 되었으며, 1527년(중종 22)에는 양양부사(襄陽 303
府使)를 거쳐 1532년(중종 27) 파주목사(坡州牧使)를 지냈다. 1533년(중종 28) 구수담(具壽聃), 이준 구비전승
경(李浚慶) 등과 함께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선비들의 무죄를 상소하여 여러 번 삭직되었다 다시 복
직되었다. 정권을 장악하고 횡포를 부리며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도모하던 김안로(金安老)가 · 민속
죽은 후 1538년(중종 35) 경기도 관찰사와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다시 1539년(중종 36)에는 황해도 · 경기도당굿과
관찰사를 역임하고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을 마지막으로 지냈다.
이후 고향인 오산 궐동으로 낙향하여 서재(書齋)를 세워 후학을 가르쳤다. 이때 공이 손수 심은 은
행나무에 북을 매달아 치며 마을의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공이 세상을 떠나자 은행나무가 자연적으
경기재인청
로 고사 되었으나, 200여 년이 지난 후 정조 임금 때에 죽은 나무에서 다시 싹이 나고 살아나 현재도
이 은행나무가 살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이렇게 서당을 세워 후학을 가르친 지 1년 반만인 1541
년(중종 36)에 타계하여 궐리사 뒤 문공산(文公山)에 묘를 썼으나, 후에 후손들에 의해 용인시 남사면 / 성씨
완장리로 이장되었다. 묘비에는 평생청고(平生淸苦 : 평생을 청빈과 고생으로 살았다)라고 써 있어 · 인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한편 공은 선조 때 광국공신(光國功臣 : 명나라 역사에 잘못 기록된 조선 종실계를 바로 잡는데 공
을 세운 19명에게 내린 공신훈호) 원종(原從) 2등에 추록되었고,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그리고
1746년(영조 22)에 공이 일찍이 명나라에 가서 종계무(宗系巫)를 변론한 공으로 광국공신 원종 2등에
추록되었고, 이해에 이조판서 겸 양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공자의 자손을 우대
할 방도를 강구하라.”는 정조의 명을 따라 고향인 오산에 공이 강학(講學)하던 옛터에 궐리사(闕里祠)
를 신축하게 했다. 또한 창덕궁 이문원(摛文院)에 있던 공자의 진본 영정을 궐리사에 모시게 하고, 정
조가 친히 궐리사 편액을 하사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산화성궐리사이다. 이후 여러 임금들이 궐리사에 제문(祭文)을 내렸고 수원부사를
비롯한 경기 관찰사 등에게 제례에 참여하도록 명하였다. 따라서 오산화성궐리사는 국가에서 세운
궐리사이다. 오산화성궐리사에는 공자(孔子)가 세상에 태어나서 73세로 영면할 때까지의 성적(聖蹟)
을 기록한 공부자성적도(孔夫子聖蹟圖)의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
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 燃藜室記述 ․ 國朝榜目 ․ 淸選考 ․ 大東野乘 ․ 己卯諸賢傳 ․ 海東雜錄 ․ 己卯錄補遺.
오산학연구 1, 수원의 인물.
2. 공석정(孔錫政)
1902년 4월 10일 ~ 1944년 6월 8일
오산시 궐동 오산화성궐리사 근처에서 태어난 사회운동가이다. 본관은 곡부이며, 후손은 없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