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8 - 제6권
P. 308

옥고(獄苦)를 치렀으며, 투옥(投獄)하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
                  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騷擾) 혐의로 태형(笞刑) 90대를 받았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본경찰과 일본인 폭행 등으로 체포 및 석방을 반복하면서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어
                  갖은 고초를 겪다가 인천(仁川)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일제에 당한 잔혹한 고문의 여독(餘毒)으로 간절히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지켜보지 못한 채,
                  1939년 10월 27일 고향땅인 오산(烏山)을 등지고 인천 용현동(仁川 龍現洞)에서 순국(殉國)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8월 15일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1919. 11. 06. 경성지방법원), 3·1운동실록(이용락) 375·37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343∼
                  348면, 독립유공자공훈록, 두산백과사전 한국사회 인물편(네이버 참조), 오산아래뜰공원 3.1독립항쟁의사 추모비,

                  1959년 발간 곡부공씨 파보 4권 29면, 1996년 발간 곡부공씨 세보 2권 62~63면, 화성시사(화성시사편찬위원회).





                  4. 공희(孔禧)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오늘날 오산에 곡부(曲阜) 공씨가 처음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바로 공희로부터이다. 공희는 현재
                  의 오산시 궐동(옛 수원부 중규면 구정촌, 혹은 수원군 초평면 구정촌)의 궐리사 부근에 터를 잡고 살

                  았다고 한다. 공자의 60세손으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의 벼슬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追
                  贈)되었다. 공서린의 고조부이며, 묘는 오산 인근의 화성시 동탄면 만의산 동쪽 무봉산(舞鳳山)에 있다.



                  참고문헌


                  공씨 족보, 오산시사 1999.




                  5. 권율(權慄)


                  1537년(중종 32년) ~ 1599년(선조 32년)
                    조선시대 명장으로 장군의 행주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오산시사
                  3대첩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이다. 도첨의

                  (都僉議) 보(溥)의 9세 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겸 강화진관 병마첨절제사 적(勣)이고, 아버지는
      제

      6           영의정 철(轍)이다.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고, 영의정까지 역임한 이항
      권
                  복(李恒福)의 장인이 된다.
                    1582년(선조 15) 45세의 나이에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
    306
   303   304   305   306   307   308   309   310   311   312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