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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군대의 요새로 만들었다. 이후 정조 때에 세마대를 중수하여 내려오던 것을 1910년 경술국치 후에 309
왜인들이 세마대를 파괴했다. 이것을 1957년 시민들이 힘을 모아 다시 세마대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구비전승
있다.
참고문헌 · 민속 · 경기도당굿과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백사집(白沙集), 상촌집(象村集), 이계집(耳溪集), 송자대전(宋
子大全),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임진전란사(이경석, 신현실사, 1976), 오산시사 2009.
경기재인청
6. 김경도(金敬道)
1885년 ~ 1927년 / 성씨
오산시 오산동(옛 수원부 성호면 오산리)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9일 당시 34세 · 인물
의 나이로 수원군 성호면(城湖面) 오산시장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물이다.
오산시장에서는 1919년 3월 29일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날은 마침 오산장날이라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다. 군중 300여 명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에 나섰다. 일본경찰이 시
위행렬의 앞을 가로막으며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선두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던 안낙순(安樂順)과 유진
홍(兪鎭弘)에게 기를 내리라고 하였으나, 군중은 더욱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일본경찰은 태극기를
빼앗고 유진홍 등을 주재소로 강제 연행하였다. 이것을 본 군중은 일제히 만세와 함성으로 잡힌 사람
을 내놓으라고 시위하며, 마침내 주재소 앞까지 다다랐다. 겁을 먹은 경찰은 대표자가 나와 이야기를
하자고 하여, 김경도는 이성구와 함께 대표로서 경찰과 담판하게 되었다. 경찰은 결국 체포된 사람을
내놓았다.
김경도는 오후 7시 30분경에 5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까지 몰려가, 행동을 같이 하지 않
는 면장에게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요구하였으나 면장은 거절하였다. 김경도 등은 면사무소의
기물을 파괴하고 급기야 면장의 집까지 몰려가 시위를 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김경도는 11월 6일 경
성지방법원에서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2월 17일 경성복심법원
에서 기각되었다. 그는 다시 상고하였으나, 1920년 2월 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
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判決文(高等法院:1920. 2. 7),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1991) 別集 1권 326면, 刑事控訴事件簿,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5집 343~346면,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158~159면,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19. 12. 17),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11. 6), 공훈록공적조서(공적개요독
립유공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