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6 - 제6권
P. 316
乾)과 남강(南江)에 투신 자결하였다. 사후인 1603년(선조 36)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1618년 (광
해군 10년) 영의정에 올랐다. 나주의 정열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
書院),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 등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에 《건재
집》이 있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난중잡록(亂中雜錄), 수은집(睡隱集), 계곡집(谿谷集), 건재집
(健齋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징비록(懲毖錄), 오산시사
2009.
11. 당성(唐誠)
1337년(충숙왕 복위 6) ~ 1413년(태종 13)
고려말과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밀양 당씨(密陽唐氏)의 시조이다. 본래 중국 절강성(浙江省) 명주
(明州) 사람으로 송나라 휘종(徽宗) 때의 승상 각(恪)의 6대손이다. 자는 유일(惟一)이고, 호는 절강처
사(浙江處士)라 했다가 귀화한 후에는 해동처사(海東處士)라 했다.
원나라 말기에 전란을 피하여 고려에 귀화하여 정동행성연사(征東行省椽史)가 되었고, 그 뒤 중랑
장 겸 사평순위부평사와 판전농시사 등을 역임하였다.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이 시해당하자 이성
계 등 신진사대부 세력과 협력하여 조선 개국에 일조하게 된다. 이 때문에 1392년(태조 1) 개국원종공
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예조·형조·공조의 전서(典書)를 역임하였다.
1398년 호조전서로 재직 중 노비소송에 패하자 노비변정도감을 비방하다가 파직되었으나, 곧 검교
판한성부사에 제수되어 문서응봉사제조(文書應奉司提調)를 겸하였다. 1401년(태종 1)태종에게 실직
(實職)에 보임하여줄 것을 청하여 개성부부유후(開城府副留後)에 제수되었고, 1409년 공안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1412년(태종 12)에는 임금이 당성에게 처가 향인 밀양으로 본향(本鄕)을 삼게 하여 당씨의 관적(貫
籍)을 하사하였다. 1413년(태종 13) 11월 3일 공이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77세였다. 임금이 매우 슬퍼
하여 제문을 짓고 내관을 보내 조문을 하였다. 공은 성품이 근실하고 율문(律文)·사대문서(事大文
書)에 능하여 고려 말과 조선 초의 형정(刑政)과 외교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공의 묘는 오산시 내삼
오산시사 미동 산 21-3번지에 있다.
제 참고문헌
6
권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밀양당씨족보(密陽唐氏族譜).
314